고양이 설이 버전
새 집에서 설이의 고정 잠자리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고작 이틀 밤이 지났을 뿐이다.
첫날은 설이의 유일무이한 사랑의 존재
아들 녀석이 자는 침대 한 쪽 옆에서 같이 잤고
어제는 아들 녀석이 갔으므로 애정도 두 번째인
내 침대 한쪽 옆에서 같이 잤다.
보통은 자신이 자는 자리가 있는데
(대부분 거실이었는데)
아직은 무섭고 두려운 것이 많은 공간들인지
어디 숨을 생각은 하지 않고 내 주변을 주로 맴돌고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자신만의 히든 공간을 만들어
내가 애타게 찾거나 불러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도하게 자신의 자태를 순순히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곧 그리될 것이라 믿는다.
아직 막내동생 부부에게는 자발적으로
가까이 다가가거나 하지는 않지만
2년 전에는 자주 집에 왔었고
(하나뿐인 막내동생의 아들 녀석이 입대전 아르바이트를 우리집에서 다녔었다.)
자신을 많이 이뻐라 해주었다는 기억이 남아있는지
심하게 경계하거나 으르렁 거리지는 않는다.
아마도 곧 내가 없을 때 자신의 밥을 주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애교도 부리고
발라당 눕는 치트키 묘기도 보여줄 것이다.
우리 설이가 그 정도의 센스와 머리는 있다.
이사오면서 작업하던 6인용 식탁을 버리고
이제는 내 침대 아래 작은 책상과 아들 녀석이 버리고 간 모니터를 놓고 작업을 한다.
특히 아침 브런치를 쓸때면 설이는 꼭
내 노트북 주변에 앉아서 나를 쳐다보다가
집안과 밖의 동태를 살피다가 했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책상 공간이 너무 비좁음을 느꼈나보다.
어디 앉을까 고민하는 눈치이다.
얼른 내 노트북을 한쪽 끝으로 옮기고
설이 몫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더니
만족한 모습으로 식빵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맞추어가면 될 것이다.
아들 녀석만 없어서 그렇지 지난번 집보다 돌아다닐 것도 구경할 것도 많으니
너에게도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만
(좋은 점을 빨리 찾고 나쁜점은 눈을 감아라. 할 수 없다.)
3층에서 18층이 되어서 나무와 벌레와 바람과
눈과 비를 느끼는
고양이만의 낭만 감성은 엄청 떨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고소공포증의 발동인지 아직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 보지는 않는다.
아침에 창밖 내다보는 것이 설이 주요 일과 중 하나였는데
놀이터에서 학교가기 전 그 바쁜 시간에 놀고가는
몇몇 아이들을 살펴보는 일이 재미가 쏠쏠했는데 말이다.
그건 어떻게 해줄 수가 없겠다.
이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단다. 안타깝게도.
(눈이 엄청 왔는데 아직 눈사람은 못보았다.
학교에도 이 아파트 단지에서도.
어딘가에는 분명 있을텐데 말이다.
오늘 사진은 중학생들이 만들었던
작년 버전의 눈사람 작품이다.
올해도 멋진 작품 감상을 기대해본다.
내가 좋아하는 멋진 달도 올려다 볼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사진도 못찍었다.
올해 마지막 슈퍼문에 콜드문인데.
할 수 없이 스레드에서의 감상으로 대신하는 중이다.
그럴때도 있다. 그게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