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않은 혼밥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93
생일날이 우울해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나는 일 년 중 11월 5일을 제일 싫어한다. 바로 오늘이고 내 생일 날이다.
그냥 11월이 되면 우울해진다.
올해도 허무하게 다갔다는 생각이 들고
이제는 정말 늙었다는 감정도 불쑥 불쑥 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꼭 그때가 되면 첫 추위가 찾아와서
가뜩이나 안좋은 나의 호흡기를 힘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대학 첫 생일날,
생일 모임을 멋지게 하려고 얇은 옷을 입고 연대앞에 서있었다가 호된 감기에 걸렸던 적이 있고
(그때는 정말 잘보이고 싶었던 누군가가 있었더랬다.)
그 이후로도 이런 저런 이유로 내 생일 그 즈음에 나의 컨디션이 정상인적은 손꼽을 정도였다.
심한 콧물과 함께 아니면 목이 붓고 잔기침을 하곤 했다.
생일날이 우울해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어려서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이번 생일에는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내년부터 서울을 떠나게 되면 더 이상 갈 수 없을 것 같은 곳이다.
바로 워커힐에 있는 피자집이다.
1987년 결혼 후 첫 생일을 남편과 갔던 곳이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내가 졸라서 갔을 것이다.
이벤트에는 그때도 지금도 꽝인 사람이니 말이다.
워커힐을 산책하고 피자집에서 스파게티를 먹었던 기억이 아슴프레하다.
그때도 값은 매우 비쌌던 것 같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꽃 선물도 받았던 것 같다. 물론 강요한 것이다.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생일날 이벤트라고 기억된다.
그 이후로 생일을 서로 챙기지 않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했었다.
오늘은 곧 남의 편이 될(?) 아들과 함께 갔다.
남편보다는 훨씬 센스가 있어서
2층 창가자리 예약도 해놓았고
음식도 주문해놓았고
사진도 이쁘게 찍어서 공유해주었고
오늘 따라 말도 사근사근하게 해주었다.
어떤 선물보다도 기뻤다.
나는 조금 일찍 가서 오래전부터 보고 싶던 미디어아트 전시도 구경하였고
오랜만에 특급호텔 로비도 자연스럽게 구경하였고
촌스러운 티를 내면서 한강 사진도 찍어댔고
1987년의 데쟈뷰처럼 워커힐 구석 구석을 산책도 하였다.
살짝 바람이 차가웠지만 이 정도는 참을만했다.
그리고 오늘의 가장 중요한 저녁 식사.
바질 드레싱이 특이했던 해산물 샐러드는 싱싱하고 양이 많았고(이걸 먹으니 나는 이미 배가 다 불렀다)
시그니처 메뉴인 피자는 너무 커서 반은 포장해왔으며(아들도 식단 중이어서)
킹크랩 한 조각이 올려져있는 파스타는 소스가 생각보다 걸쭉했다. (나는 토마토 소스가 제일 무난하더라.)
저녁이라 잠이 안 올까봐 맛보지 못한 호텔 커피에 대한 아쉬움은 살짝 남았다.(원래 고급 식당은 커피나 디저트 빵의 퀄리티가 다르다.)
아들 녀석은 다음 데이트를 위한 것인지 메뉴를 샅샅이 살펴보았고
사실 음식 맛이 그렇게 번쩍 눈이 뜨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언뜻 본 계산서는 꽤 금액이 나왔지만
아마도 음식값에다가 멋진 뷰와 친절한 서비스와 기분값을 더한 것인 만큼일게다.
언젠가 아들 녀석도 엄마 생일날 함께 이곳을 왔다갔다는 기억 한 장면이 생겼을 것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하루였다.
집으로 오는 길 보았던 긴 손톱 초승달과 금성은 올해 내 생일 선물로 차고 넘쳤다.(차 타고 지나가다 봐서 사진을 못 찍은게 너무 아쉬웠는데 sns 에 많이 올라와 있더라. 다 내 생선인걸로)
톡으로 축하를 보내준 많은 제자들이 있어서, 그리고 많이 춥지는 않아서
다른 해처럼 그렇게 싫기만 한 11월 5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년 생일에는 며느리와 함께하는 식사(?)가 희망사항이다.
아니다.
꼭 밥을 같이 안 먹어도 된다.
며느리가 생긴다면 그것만으로 더할나위없이 댕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