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않은 혼밥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96
섣부르게 아는 것은 모르는 것보다 더 낭패일때가 있다.
힘든 일요일을 보내고 나니 월요일부터 늘어진다.
오후 네 시반에서 다섯시까지는 졸려서 글도 못쓰고 자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저녁을 준비하고 먹고 설거지를 마치고 나니
다시 반짝 기운이 난다. 그래도 그 약효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은 잘 알고 있다.
양천구 목동에 오래 살던 나에게 잠실이란 정말 멀고도 먼 곳이었다.
아들녀석이 유치원에 다닐때이던가
어린이 날 기념으로 잠실야구장을 오픈해주는 행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날 온 가족이 손을 잡고 잠실야구장에 와서 행사와 야구를 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근처 롯데월드는 몇 번은 왔었고
배구를 보러 근처에도 왔었지만 잠실 야구장에 대한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다.
오래전부터 야구를 좋아했기는 했지만
직관의 기억은 고등학생때 아버지와 함께 동대문 야구장을
대학생이 되어 친구들과 함께 동대문 야구장을
그리고 엄마가 되어 아들과 함께 잠실야구장을
교사가 되어 학생들과 함께 목동야구장을
그리고는 작년과 올해 <최강야구> 덕후가 되어 간 고척 야구장 직관이 전부였다.
그런 내가 잠실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왔고
고척에서 야구보고 오느라 너무 힘들어서 잠실에서의 야구를 보고 싶었고 어제가 바로 그날이었다. 올해의 라스트 댄스 in 잠실인 셈이다. 나에게도 <최강야구> 에게도
12시부터 선수들이 몸푸는 웜업을 공개해준다해서 일단 그 시간에 맞추어서 들어갔다.
열심히 정성껏 준비운동을 하는 선수들의 모습에서 오기를 잘했다고 느꼈지만 이내 춥고 배가 고파졌다.
어제, 전날 대비 온도가 거의 10℃가 낮아졌고 아무리 패딩을 입고 기모바지와 기모후드티를 입었다고 해도 춥고 배고픈 본능은 피하기가 힘들었다.
티켓도 받았고 선수들도 보았으니 세시 시합 시작전까지는
조용하고 따뜻한 곳에 가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쉬다가 오고 싶었다. 꿈은 창대했다.
그런데 잠실 야구장 근처에는 그런 곳이 없더라.
분식집, 피자집, 치킨집이 주로 있었는데 대부분 포장판매이거나 그 시간에 이미 좌석이 만석이었다.
시간과 사람에 휘둘려서 점심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우아함과 따뜻함을 지키고 싶었다. 그때까지는.
어찌할까 하다가 다시 지하철을 타고 두 정거장인 잠실역으로 나갔다.
롯데월드 학생 인솔 때 맛난 식당이 많이 있었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오늘 글의 핵심이다. 대강 알고 있었던 것이 패착이다. 차라리 확실히 알고 있었던 삼성역을 선택하는 것이 나았었다.)
그리고 어제가 주말 점심이라는 사실을 간과했었다.
딱 점심 시간이었고 잠실역과 백화점, 롯데월드 주변에도 야구장 못지 않은 사람들로 꽉차서 웬만한 식당은 모두 대기 상태였다. 갑자기 멘붕이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도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따뜻한 음식을 배불리 먹어두고 싶은 본능이 작용했다.
이리 저리 지하를 돌아다녀도 좌석이 있으면서 메뉴가 마음에 딱 드는 식당을 발견할 수는 없었고
지치고 다리도 아파서 포기할때쯤 간신히 지하상가 한 편의 분식집을 발견했다.
메뉴에 적혀있지 않아도 모든 음식이 다 된다는 신기한 이모 오마카세 형식의 좌석 5개의 식당에서
나는 고민끝에 잔치국수를 주문했다.
처음가는 식당에서는 맛의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안전빵 메뉴를 선택하는게 나의 습성이다.
호박썰은 것과 유부 그리고 파와 달걀 푼 것이 올라가 있는 고전적인 잔치국수를 앞에 두고
나는 유명한 유투버 먹방처럼 면치기를 하고 싶었고 배는 많이 고팠으나 국물이 너무 짰다.
(이쯤이면 내가 너무 싱겁게 먹는 것이 맞나보다.)
할 수 없이 몇 숟가락 먹지 못하고 지하철 역 앞의 올해 첫 팥 붕어빵을 하나 물고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야구장 내에서 홈런볼 하나와 생수를 사고(잠실 야구장 편의점에서는 대형 홈런볼만 판다. 생수도 에비앙만 판다. 참고하시라.)
쫄깃 쫄깃한 야구를 구경하고 녹초가 되어 집에 와서
라면 반개에 파 듬뿍 썰어넣어 신김치랑 먹고 났더니 노곤노곤 잠이 몰려왔다.
아들 녀석 귀가하는 소리도 못들은것 같다.
어제 글에서는 잠실야구장 근처 맛집을 탐방하리라 큰소리를 땅땅 쳤었으나
유명하다는 새마을식당은 방문할 엄두도 못내고(아예 몰랐으면 이곳을 갔었으리라)
구운 오징어, 치킨은 양이 많아 혼자서는 도저히 못먹을 것 같았고(장사하시는 분들이시여 혼자 보러 오는 사람도 고려해봐주시라)
유명한 맥주보이는 보긴 봤으나 마셨다가는 추워서 감기에 직통으로 걸릴까봐 걱정되었고
결국 잔치국수, 홈런볼, 에비앙 생수와 두통약, 그리고 라면 반개로 마무리한 어제는
먹거리로만 본다면 낙제점에 가까운 하루였다.
그러나 잠실야구장에서의 파란 하늘과 일몰 즈음의 멋진 광경 그리고 응원과 함성, 불꽃놀이와 함께한 추억을 떠올리면 미소가 지어질 것도 같다.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는 법이다. 가끔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