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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생적 오지라퍼 Dec 19. 2024

늙지않은 혼밥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109

한 치 앞도 모른다.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던 주말 부부의 호사를 누리고 살았었다.

주말에만 올라와서 밥을 같이 먹고 반찬 몇가지를 싸가지고

시어머님을 뵙고 다시 아산 공장으로 내려가는 루틴을 지키던 남편이

이번주 첫 항암을 하고도 일상을 지켜보겠다더니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은 알겠나보다.

새벽에 항암제와 위암세포와의 싸움을 하는 듯한 아픔도 느꼈다고 하고

어지러움과 미식거림과 함께

밥 한끼 먹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인가 생각할만큼 먹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이번 주 주방에 머무른 시간은 비약적으로 늘어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스타일의 음식 준비에 쉽지만은 않았지만 이제 나는 그만큼의 노하우는 있다.


그래도 그나마 넘어가는게 국 종류라고 했다.

첫날은 두부 굴국이었다.

단백질 보충이 꼭 필요하나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남편을 고려하여 두부를 적극 활용해보기로 한 것이다.

다음 날 아침은 소고기, 맑은 감자, 당근, 호박 함께 잘라넣은 국에 좋아하는 콩밥이었다.

점심으로는 죽을 데워먹으라 했고 작은 사이즈의 여러 종류 빵도 놓고 갔다.

그리고는 소고기 미역국과(웬일로 소고기를 다 먹었다.)

다음으로는 동생에게 힌트를 얻어 단백질이 많다는 북엇국에 두부 넣고 계란물 흘려서 주었다.

그것을 먹고는 정말 오랜만에 음식 솜씨가 늘었다는 칭찬을 하였다.

칭찬은 들었으나 하나도 기쁘지않았다.

오늘은 맛집에서 배송 받아둔 감자탕을 끓여놓고 출근했는데 맛이 괜찮았다하였고

내일은 연한 시금치 된장국과 버섯넣고 강황카레를 준비해두었다.


내일은 회사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꼭 내려가야 한다니(크리스마스까지 쭉 쉬었으면 좋겠지만)

아침으로 시금치 된장국까지 먹고 집을 나서면 될 것 같다.

여태까지 많이 아팠던 나의 경험을 토대로 특급 도우미들도 준비했다.

복숭아 통조림 황도와 백도 하나씩(이것이 부드럽고 달달하니 입맛을 돋군다.)

다양한 종류의 죽과 국 레토르를 1+1으로 주문받아 하나씩 넣었다.

너무 똑같은 것을 계속 먹으면 입맛이 더 떨어지기 쉽다.

그리고 귤, 사과, 바나나를 넣었고(좋아하는 단감은 있다.)

달달구리 빵들도 준비했다.

어느 것이 입에 맞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먹어봐야 안다. 무엇이 먹힐지는 먹어봐야 안다.


이번 주일 내가 가장 감동받은 것은 아들 녀석의 세심함이었다.

원래 츤데레 스타일인 것은 알았으나

아픈 아빠를 위해 모자와 외투, 가방을 선뜻 내어주었고(물론 자기가 사용하지 않는 것이기는 하다만)

매일 정시 퇴근해서 아빠랑 저녁을 같이 먹어주었고(연말인데 이것은 대단하다.)

자기 방의 배치를 바꾸면서까지 아빠에게 소중한 TV를 양보해주었고

그렇게 잔소리해도 하지 않던 책장 정리와 옷장 정리를 말끔하게 끝내주었다.

그리고는 수시로 아빠의 안녕을 체크하는 모습을 보여서 참으로 좋았다.

내가 아플 때는 귀찮아하는 모습만 보이더니

큰 병이라 다른 것인지, 아버지라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남편이 주말에 올지, 크리스마스에 올지는 아직 분명치 않으나

다음은 콩나물국이고 그 다음으로는 소고기 무국, 오뎅국, 달걀국이다.

매운 국은 힘들 수 있으니 맑고 영양가 많은 국 리스트를 뽑아두어야겠다.

아들 녀석 다이어트 식단으로 국을 안 끓이고 두 달여를 지냈는데

이제 남편 항암 식단으로 국에 신경을 쓰는 식단이 되고 있으니

세상 참 한 치 앞을 모른다.

(아마 저 사진속의 도 지금이 추운 겨울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알고있다면 저렇게 새눈을 만들지 않았을게다.

나와보면 많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세상 녹록치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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