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자리
이번 명절은 결혼식 후에 처음으로 맞이한 명절이었다
친정에서 제사와 차례를 지내왔기에 나와 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전 부치기와 설거지를 했고 나머지는 어머니 혼자서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아버지는 일 끝나고 집에 오면 꼭 손으로 전 몇 개씩 집어먹으며 이건 짜다, 어떻다, 몇 마디 코멘트 후에 정해진 퇴근 루틴을 따라 저녁을 먹고 TV 스포츠 채널 앞에 쪼그려 앉아 신문을 보다가 일찍 잠에 드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결혼을 해서 좋은 이유가 무엇인지 도저히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평상시 부부로서 다정한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집안은 항상 우울한 분위기에 가득 차있었다
동생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고 감정을 억제하며 사는 성격으로 변했고 나 역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부정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경제적 여유 없이 무턱대고 나이에 맞춰서 하는 결혼과 출산은 재앙이라는 주의였다
그래서 남 피해 주지 말고 나 혼자 행복하게 먹고 살길을 찾자는 생각으로 자기 계발에 몰두하며 살아왔다
집에 들어가면 행복보다는 한숨만 나오는 분위기에 잠만 겨우 자며 가족 간 생활시간을 겹치지 않게 피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다
이런 내가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산 한 사람을 만나 결혼하게 되니 내 주변 사람들은 다 똑같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네가 정말 결혼할 줄 몰랐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
그간 주변에 너무 비혼선언을 해버려 딱히 할 말은 없었다
혼자가 아닌 타인과 잘 살 수 있을까?
결혼 준비를 하면서 마음이 싱숭생숭 해졌다
개인주의자로서 오만걱정이 다 들었다
하지만 내 여러 가지 가치관을 솔직하게 다 오픈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까지 진행된 것을 보면 어쩌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던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긍정적인 회로를 돌려본다
같이 산지 2년 차.
현재까지는 너무 만족하면서 살고 있다
물론 작고 큰 트러블들은 종종 존재하나 각자 할 일 열심히 하며 업무 분담도 잘되고 라이프스타일도 맞춰가니 만족감이 크다
무엇보다 가족관계에 있어서 친정은 위계질서가 있고 수직적인 가족관계여서 소통이 힘겨웠던 반면,
지금은 동등한 관계로서의 가족이라 내가 내 의견을 충분히 피력할 수 있다는 것이 만족스럽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상대방의 가족도 나의 가족이 되는 법.
우리 시어머니는 눈치가 빠르고 배려를 많이 해주신다
덕분에 항상 감사함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관계유지를 잘한다고 해도 자주 보다 보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이고 없던 갈등도 생기는 게 사람사이이다
남편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가족인 만큼 최소한의 행사로서 보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잘 보이고 싶고 갈등이 없었으면 좋겠는 내 욕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만나는 시간이 나에게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어머니 앞에서 친정엄마 대하듯 편하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나는 연차도 월차도 휴가도 없는 일용직 같은 파트강사이다
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쉬고자 하면 대강(대타강사)을 미리 구해야 한다
이 것이 허용되는 센터도 있는 반면에 센터의 퀄리티 유지를 위해 외부강사 대타가 금지되어 센터 내부에서 강사들끼리 대강을 부탁하거나 그것이 안되면 폐강시키는 경우도 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 자리를 꿰차는 건 언제든지 가능하다
경쟁심과 책임감 등 여러 이유로 나는 프리랜서 생활 중 단 하루만 대강을 신청했다
심지어 결혼식 전날에 저녁 10시까지 근무했고 신혼여행도 연휴를 끼워서 2박 3일로 국내로 다녀왔기에 대강 없이 신혼여행 후 바로 다음날부터 출근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에게 무려 4일이나 연달아 있는 설날은 빅이벤트였다
명절 당일 하루에 몰아서 부지런히 움직여 시댁과 친정을 하루에 다 방문하여 남은 3일은 온전히 집정리와 휴식할 생각을 하니 없던 힘도 생겼다
매일 울리던 알람을 혹여나 못 들을 까 두 번 세 번 체크할 필요도 없다니 생각만 해도 설레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미리 하루에 다 방문할 거라고 일정을 공유했고 방문 시 드릴 용돈과 선물도 준비가 되었다
당일이 되어 시댁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친정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에 저녁에는 집 근처에서 남편과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숙제를 끝낸듯한 가벼운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 예상보다 너무 빨리 끝난 일정에 이렇게 빨리 끝나도 되나 불안할 정도였다
그래도 주변사람들 중 4일 내내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도 있고 나와 똑같이 결혼 후 첫 명절인데도 시댁 방문 없이 집에서 쉬고 있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며 '이만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화장을 지우는 중에 갑자기 남편이 말했다
'시어머니께서 내일 큰 어르신께 인사드리러 가자고 해서 아침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나는 당황했고 서운함이 몰려왔다
역시나 불안했던 마음은 현실이 된 것이다
친정은 저녁이든 언제든 얼굴만 잠깐 봐도 괜찮으니 하루에 모든 일정을 다 끝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고 말했었다
나는 남편 쪽 명절행사를 어떻게 보내는지 알 수 없었기에
차례나 제사는 하는지, 어르신은 보러 가는 건지 미리 물어봤고 그냥 시댁에서 아침만 먹으면 된다기에 그렇게 믿었건만 이제 와서 원래 하는 행사인데 친정을 점심에 가서 미뤄진 거라니..
시어머니도 남편도 아무 말 없었는데 이제 와서 저녁에 갑자기?
만났을 때 얘기해 주셨으면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던 부분인데 굳이 비효율적으로 두 번 일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나왔다
정말 간절히도 쉬고 싶었나 보다
타인을 상대하는 것은 나에게 휴식이 아닌 일이다
결혼 전 명절에도 시어머니의 형제분들께 인사드릴 겸 뵌 적이 있는데 다수를 한 번에 만나는 자리라 이름도 관계도 잘 모르는 상황에 어떤 분이 갑자기 과일 깎아보라며 과일 몇 개와 칼을 부엌에 두고 가시길래 칼질이 서투른 나는 당황스러워서 울 뻔한 적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울음을 간신히 참으며 손가락을 베일 각오로 서툴게 깎는 데 시어머니가 달려와서 대신 깎아주셔서 더 울뻔했다
결혼 후 가족행사 자리에서는 아이 언제 낳을 거냐면서 다들 한 마디씩 하셨다
으레 인사치레로 하는 얘기인걸 알기에 큰 의미부여는 하지 않았으나 일련의 일들로 인해 앞으로도 최소한의 만남만 하고 싶었다
미리 자세히 얘기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대비도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통보란 참 당황스럽다
중간역할을 꼭 그렇게 무심하게 했어야만 했나 싶어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남편과 잠깐 언성도 높였다가 줄였다가 이런저런 대화를 하고 나는 그냥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이 내 마음을 진정시켰고 그 시간만큼은 편하게 펑펑 울 수 있었다
모든 게 서러웠다
씻고 문을 열었더니 남편이 문 앞에 서있었다
미안하다고 머리를 말려주니 참았던 눈물이 다시 터졌다
본인이 어머니께 아프다고 둘러댔고 다음 명절 때부터 찾아뵙겠다고 말했단다
'그래, 그 한마디면 될 것을..!'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코 고는 남편 옆 잠자리에 누워 하루에 있었던 여러 가지 장면들이 머리에 스쳤다
옛날에는 감정표현 하나도 없던 울 아빠가 가는 길에 먼저 울컥하며 포옹해 준 것.
임플란트 잔뜩 한 울 엄마 해맑게 웃는 데 송곳니 자리에 이빨이 텅 비어있어 물어보니 어제 임시로 끼워둔 치아가 빠졌다고 한 것.
그렇게 이빨 빠진 약한 모습 보일 거면
그렇게 나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진작 그렇게 다 같이 사랑 표현하면서 살지..
짠하고 서글픈 마음에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핑 돈다
미워도 어쩔 수 없나 보다 가족 간의 정이란
여러 가지 감정의 소용돌이가 휩쓸고 간 자리는 다시 평화로움이 찾아왔다
지나간 그 자리에 좋은 감정만 남겨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