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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할 수 없는 일

동화 쓰기 수업에 참여했다.

by 나니야

작년 12월, 대한민국이 뒤집히는 사건을 기점으로 나의 일상이야기가 무거워졌다.

올해, 새 대통령이 취임을 했다. 나라의 일은 그에게 맡겨두고 나는 나의 가벼운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쓰기 위해 약간 정리를 했다. 그리고 나는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지난달 일주일에 하루, 총 5회의 강의로 이루어진 동화 쓰기 교실에 참여했다.

동화작가가 강의하는 글쓰기교실로 인원제한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참여가 확정되어 기뻤다. 작가의 동화책도 구입하여 읽으며 동화 쓰기에 대한 기대를 잔뜩 가지고 수업에 참여했다.

첫 수업부터 실전에 돌입하는 공격적인 내용의 수업이었다. 어차피 글쓰기 수업이니 당연히 글쓰기 실천을 하게 되리라는 기대로 눈을 반짝이며 강의를 들었다. 작가는 동화의 내용에 대해 쉽게 설명하며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글쓰기의 실천에 임하는 내 머릿속은 난리도 아니었다. 내가 쓴 글은 동화 같지 않았다. 수업은 자신이 쓴 글을 발표하며 피드백이 진행되었다. 와우, 다들 톡톡 튀는 표현에 어린이 같은 표현들. 어쩜 그렇게도 잘 쓰던지.

그들의 글에 비하면 나의 글은 문장을 나열한 수준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글에 대한 피드백은 모나지 않은 평범한 글이라고 했다. 평범한 글, 좋은 어감이지만 동화 같지 않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아이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힘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두 번째 수업에서도 글쓰기는 진행되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내용에 대한 강의였다. 어김없이 글쓰기 실전에 돌입하였다. 생태에 대한 주제로 진행된 글쓰기에 나는 생태와 자연에 대해 어떠한 이야기도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구체적으로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자고 하는데, 동물을 싫어하는 나는 별로 떠오르는 표현이 없었다. 기껏 아들이 키우는 고양이가 잠시 떠올랐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던 나는 고양이가 앉아있는 모습에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어김없이 글쓰기를 마무리하는 과제가 주어졌고 4일 후에 톡방에 자신이 쓴 작품을 올리면 수업시간에 피드백을 해주기로 했다.

세 번째 수업이 진행되는 날까지도 나는 글쓰기를 하지 못했다. 세 번째 수업에서 다른 수강생들은 좀 더 동화스러운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첫 번과 두 번째 수업이 지나도록 표현력 하나 늘지 않았다. 세 번째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나를 돌아보았다. 생태에 대한 이해도 자연에 대한 감상도, 심지어 식물과 동물에 대한 공감도 하지 못하는 내가 생태동화를 진행할 수 없었다.


동화는 수필과 시와는 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다는 것은 아이들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감성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나에게 아이들은 예쁘고 귀여운 존재가 아니었다. 길 가다가 아이가 있으면 예쁘다고 만지고 싶어 하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감흥이 없었다. 아이를 봐도 그렇게 예쁘지도, 귀엽지도 않았다. 아이뿐 아니라 동물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강아지가 귀엽다고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친구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겼다. 내가 낳은 아이는 달랐다. 내 자식이라 사랑스럽고, 그래서 보호하고 양육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는 아이를 보면서 그 아이의 인생이 있고, 나는 내 아이가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길 원하는 성인이었다. 아이들도 그런 나의 감정을 알았는지 특별한 속 썩임 없이 무난히 학교생활을 했고, 무난히 성인이 되었다.

그런 내가 동화를 써보겠다고 시작했으니 난관에 부딪히는 것이 당연하다. 도무지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무와 풀에 대해서도, 동물의 특성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물론 찾아보고 알아보면 쓰지 못할 것은 없겠지만 아이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다. 나의 동화를 들어줄 아이도 손자도 없는 나는 곰곰 생각했다. 그리고 동화 쓰기를 포기했다. 동화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어린이의 시선을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쓰는 것임을 느꼈다. 아이의 감정에 공감 못하는 이성적인 나는 공감 가는 글을 쓸 수 없다. 그래서 동화작가라는 영역이 존재하고, 동화는 그런 동화작가가 써야한다는 것을 실감을 했다.


동화 쓰기 세 번의 수업으로 또 한 번 더,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은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지만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다.


사진) 작가가 밑그림을 주고 playground에서 얻은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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