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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Oct 03. 2023

편의점과 카페

길 잃은 도시인의 등대

나는 어디를 가든지 반드시 그곳의 지형지세를 빨리 파악한다. 카페는 어디 있는지, 편의점은 어디 있는지.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가던, 잠시 어디를 다니러 가던. 그리고 나서야 새로운 곳에 적응을 시작하고 볼 일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스마트앱에서 구굴맵, 어스윈드맵, 윈디닷컴 같은 것들을 즐겨 들여다본다. 내가 있는 곳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것은 내 생존을 확인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어스윈드맵에서는 지구 위에 불고 있는 모든 바람의 흐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태풍도 허리케인까지도 볼 수 있다.  

  거점 확보. 야생 동물이 생존을 위해 자신의 위치를 지키려는 안간힘이다. 이런 동물적인 본능이 자꾸 공간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 낸다. 강아지들이 자리를 잡을 때마다 앞발로 바닥을 필사적으로 긁어 자신의 몸을 보호할 가상의 구덩이를 파는 것과 같은 본능이랄까.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이사를 자주 다녔다. 아버지가 집장사를 하는 덕분에 1년에 서너 번씩은 옮겨 다녔다. 새로 지은 집은 늘 깨끗했고 단출한 짐으로 정갈하였다. 새로 이사를 가면 텅 빈 방 한쪽에 보자기로 싸놓은 이삿짐이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나에게 각인된 공간의 풍경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미니멀리즘이 잘 구현된 장면이었다.

  대학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우리 집은 월세 방을 전전했다. 집은 비좁고 깜깜하고 숨 쉴 공간도 부족했다. 공부는 물론 휴식의 공간도 못되었다. 당연히 내 책상 같은 것도 없었다. 주로 학교에서 도서관에서 유목하는 신세가 되었다. 아마도 그 시절의 어두운 터널이 고 커다란 공간을 갈급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편의점의 시대가 되자 나는 무작정 편의점에 몰입하였다. 가지런히 정리된 매대, 시야가 확보된 통 창, 높은 층고. 그 공간에 들어서면 마음이 안정되고 여유가 생겼다. 가는 곳마다 편의점이 있으면 열심히 들어갔다. 삼각 김밥을 먹던 커피를 마시던, 새벽이던 늦은 밤이던 상관없었다. 통 창을 통해 밖의 풍경을 조망하며 마음의 위안과 여유를 찾곤 하였다.

  등대였다. 절망 속에서도 그곳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 어두움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여명. 그 시절을 견디게 해 준 고마운 공간이다.       

  그다음은 카페의 시대가 왔다. 수많은 카페가 생겼고 사람들은 카페를 찾아  거리로 나섰다. 거리는 커피 내음이 진동했다. 그 카페들도 넓고 쾌적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곳곳에  좋은 공간을 가지고 있는 카페들을 점찍어 놓고 갈 때마다 그 공간을 즐기러 기꺼이 돈을 투자했다.      

  지금 집으로 이사 오면서 나는 2개의 방을 확보했다. 하나는 침실, 하나는 책방. 거실과 안방은 남편의 영역이다. B타입 구조여서 공간이 완전히 분리되는 책보고, 글쓰기 좋은 조건이다. 책방에는 딸이 만들어준 커다란 원목 책상을 넣었다. 그 대신 한 차 분량의 책을 버려서 공간을 확보했다. 어쩌자고 쓸데없는 짐을 이고 살았을까. 영혼까지 시원하다. 모든 책은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도서관에서.  노년에 이런 공간을 확보했으니 나는 성공한 인생이 확실하다.

이제는 등대를 찾아 방황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사는 주상복합 아파트 1층에 있는 카페는 가장 좋아하는 공간 중 하나이다. 카페 앞쪽에 필로티 구조로 확보된 넓은 공간 한쪽에 커다란 원목 책상과 의자 6개를 놓아두어 책을 보거나 공부하기에 딱 좋다. 색 바랜 민트 칠을 하고 있는 빈티지 책상이다. 의자의 재료도 가죽이나 나무, 모양도 제 각각. 개성이 넘치면서도 가지런히 놓여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한여름과 한겨울을 빼고는 앉아서 바람을 느끼며 커피를 마시기 좋다. 비가 오면 금상첨화다. 비와 바람을 한 번에 만끽할 수 있다. 영혼까지도 맑아지는 느낌이다. 그 공간에 앉아있으면 코로나로부터도 잠시 해방이다. 축복 같은 공간이다. 때로는 유모차를 탄 아기들이나 지나가는 강아지들에게 아는 척하는 것도 재미있다.

  내부는 심플한 인테리어에 다양한 생화로 장식을 하고 있는데도 소박함을 유지하고 있는 점도 마음에 든다. 카페 전체는 물론 통 창이다. 12차선 대로와 골프장 양 방향으로 출입문을 2개나 가지고 있고, 그 문은 검은색이 많이 섞인 붉은색이다. 빨간색 계열인데도 은은한 깊이를 지녀 화려하지 않고 세련된 분위기를 완성한다. 커피 볶는 냄새는 덤이다.

  자본주의의 장점. 커피 한 잔을 사서 이 자리에 앉는 순간만큼은 오롯이 내 공간이 된다. 오늘은 특별히 케냐 AA 드립커피다. 가을맞이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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