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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Sep 28. 2023

우울감과 자존감

쿨함과 성격장애 그 사이 어디쯤

“재인씨는 참 이상해. 굉장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보면 다시 처음 제자리야.”

  클래식동호회에서 만나 20여 년간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지인이 어느 날  나에게 말했다. 그 때 나는 어릴 적 엄마로부터 물을 받아 마시던 광경을 떠올렸다. 밖에서 놀다 들어오면 엄마는 부엌 안에서 바가지에 물을 들고 기다렸다. 우리는 부엌 밖에서 뒷짐을 진 채 목만 내밀어 물을 마셨다. 밖에서 놀던 더러운 손이 엄마의 부엌살림을 더럽힐까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괴이한 광경이었다. 물의 목 넘김을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긴장된 상태. 그러면서 경계가 분명한 세계였다. 결벽증과 우울증이 만들어 낸 살풍경이었다. 훈육이 아니었다.

   “재인이 집에 무서운 사람 있어요?”

   “네, 엄마가 아이들을 쥐 잡듯이 잡아요.”

   “재인이 어머니 학교에 좀 오시라고 하세요.”

초등학교에 갓 입학하고 일주일이 흐른 참이었다. 50이 넘은 담임 선생님이 엄마를 호출하였다. 할머니 같이 인자한 선생님이었다. 입학 초라 학교까지 따라 다니던 동네 학부형을 통해 집안 사정을 살핀 후의 전갈이었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엄마는 부모 벌 되는 담임 선생님의 호출에 적잖이 당황했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도무지 발표하려하지 않는다, 무언가에 잔뜩 주눅 들어 있다, 엄마가 쓸 데 없이 무섭게 하는 것 같다.’  한참 동안 야단을 친 후에 선생님은 엄마에게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강요하였다. 앞으로 집에서 절대로 아이들 혼내거나 야단치지 않기로.

  내 밑으로 3살, 2살 터울 남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올망졸망 어린 아이들이었다. 밥상에 밥풀 한 알이라도 떨어질라치면 머리를 쥐어 박히기 일쑤였다. 그것을 보는 동네 아줌마들은 반찬도 제대로 못해 먹이고 간장만 먹이면서  아이들만 잡도리한다고 한마디씩 하였다. 유별난 성격이라고 수군대었다.

  그 이후로 엄마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고 한다. 부모 같은, 하늘같은 선생님과의 약속이었고, 딸이 잘못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었던 듯하다. 그 결과 나는 조금씩 내 본능을 회복했다. 책 읽기 좋아하고 매사에 호기심 많은 본래의 나를 찾아갔다. 수업시간에도 활발해 졌다. 지금 내 기억에는 없지만 아마도 선생님이 치밀하게 신경을 썼을 것이다.

  4학년 봄 학기가 지나서 담임 선생님이 엄마를 또 호출하였다. 이번에도 나이 많은 할머니 선생님이었다. 내가 수업시간에 너무 많은 질문을 하여서 선생님을 곤란하게 하니 좀 자제시켜 달라는 부탁이었다. 내 기억에 그 선생님은 실력도 카리스마도 없는 선생님이었다. 무슨 질문을 하여도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다. 한창 물오른 나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나는 적잖이 짜증이 나 있었다. 아마 다른 아이들 앞에서 체면을 구기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였던 듯하다. 이번에는 내가 작심을 하였다. 더 이상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지적 호기심은 문을 닫았다.      

  아버지는 첫 딸이 태어나자 너무 기뻐서 출근도 안하고 핏덩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그 뒤로 아들 셋이 태어났지만 여전히 딸을 귀히 여겼다. 우리 집에서 남녀 차별이란 있을 수 없었다. 남동생이 있는 다른 집 누나들은 대개 동생에게 무시당하거나 맞거나 하던 시대였다. 하루는 밑의 동생이 누나한테 욕 한마디 했다가 아버지한테 눈물 쏙 빠지게 야단을 맞았다. 그 이후로 감히 누나한테 덤비지 못했고 나는 동생들 앞에서 늘 기를 펴고 살았다.

  대학을 갈 때도 반드시 남녀공학을 선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물론 나의 생각도 같았다. 심지어는 공대를 가라고 하였지만 문학적 취향을 가지고 있던 나는 문과를 전공하게 되었다. 아버지 말대로 공대를 가서 건축을 전공할 걸 하는 후회를 가끔 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저녁엔 여자도 술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소주를 따라 주었다. 그렇게 아버지 앞에서 소주를 배웠다. 사회에 나와서도 한 번도 여자여서 불이익을 당한 적이 없었다. 늘 당당하고 자존감이 높았다.      

  엄마 부엌의 문지방은 절대 넘을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었다. 나는 절대 남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평소에 남의 일에 별로 관여하지 않고, 남의 평가에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쿨한 성격이나 자존감이 높아서라 자부하였는데, 알고 보니 이건 일종의 성격 장애였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계속 장점으로 알고 살아갈 밖에. 때로는 상대방의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래도 괘념치 않는다.

  두 선생님과의 경험도 극단이었고,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받은 영향도 극단적이었다. 인생의 고비마다 깊은 우울감이 똬리를 틀고 있었고 그 때마다 높은 자존감으로 나를 간신히 지탱해냈다. 추운 겨울밤 한강다리를 건너며 뛰어내릴 장소를 물색할 때도,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인생의 바닥에서도 결국 살아남았다. 1학년 때의 선생님과 아버지가 길러준 높은 자존감 때문이었다고 종종 생각한다. 때로는 나 자신을 잡초에 비유하기도 한다. 끈질긴 생명력이 닮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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