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2
산등성이에 올라 기울어가는 해를 보자니 설움이 치고 올라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작년 팔월 그 뜨거웠던 폭염을 뚫고 막내아들을 배웅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산에는 또 비가 내렸다.
아버지는 충남 서산군 운산면 갈산리에서 안동을 본관으로
할아버지 김 재 자 학 자 경주가 본관이신 할머니 정 자 임 자의 사 남매 중,
위로 고모님 아래로 작은아버지 둘을 둔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충렬공 제학공파 25 세손인 아버지는 1916년 용띠인 병진생으로 윤자 회자를 쓰셨다.
1926년 호랑이띠인 병인생으로 평산이 본관인 신 옥 자 균자이신 어머니와
1942년 동짓달 그믐날에 혼인하셔서 슬하에 아들 셋과 딸 넷을 두셨다.
열세 살 되던 해에 급병으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족이 흩어지게 되었더란다.
아버지의 간난신고는 이루 말할 수 없어 필설로는 다 옮길 수조차 없었단다.
개 같은 왜놈들에게 함경북도 회령까지 끌려갔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쳐 살아남으셨다.
당시에 떵떵거리던 광산주인에게 눈에 띄어
인물 좋고 명민하시기까지 한 아버지는 후에 작은 금광을 책임지는 자리에까지 오르셨다.
간과 쓸개도 나누어 가질 의형제에게
홀랑 털리는 일까지 겪으시고 그 후 사람을 무던히도 경계하셨다.
밥상머리에서도 늘 강조하신 게 사람을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세상엔 너를 이롭게 해 줄 사람이 없으니 너 자신만 믿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그때의 트라우마가 평생 아버지의 그늘이 되어 따라다닌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미치자 서러움과 안타까움이 산사태처럼 밀고 들어왔다.
육이오 사변이 터졌을 때 내려온 공산당이, 조금 있으면 벼꽃이 하얗게 필
논을 가리키며 "이제는 당신들 땅이니 맘대로 하시오"라고 하였단다.
사람들은 얼씨구나 춤을 추면서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그러셨단다.
"없는 사람에게 논을 나누어준다니 고마운 일이나 지금 저 논에 모를 심은 일도 없고,
가꾼 적은 더더구나 없는데 어째서 저것이 내 것이오. 나는 지금 준다 해도 받을 수 없고,
심은 사람이 주인이니 추수가 끝나면 내가 받겠소 하였단다.
이일로 공산당의 표적이 되어 도망 다니는 처지에 이르렀다.
막 태어난 핏덩이 작은형을 데리고
저수지 갈대숲에도 숨고 친척집 고구마 저장소인 굴에도 숨고 하여 목숨을 건지셨다.
이 같은 이야기를 들은 같은 동네 지주인 조 씨가 아버지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하였단다.
"전쟁이 터졌을 때 맨 처음 앞장서서 공산당을 반길 사람이 자네일 줄 알았는데,
이번에 자네 마음을 알았네. 이 전쟁이 끝나면 내가 자네에게 논 다섯 마지기를 줌세." 하였단다.
그의 말은 가세가 곤궁한 아버지가 제일 먼저 공산당을 환영할 것 같아 무서웠단다.
공산당이 패주 하기 직전 지주인 그 사람은 죽창으로 무참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단다.
둘이서만 한 약조가 무너졌지만,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가끔씩 나에게 들려주시곤 하셨다.
공산당이 떠난 뒤 인근동네를 아우르는 치안대장을 맡으셨다.
아버지의 도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통행을 할 수 없었다.
위변조를 예방하기 위해 도장을 여러 개 만드셨고,
각각에 표식을 해두어 불순한 사람들을 색출하셨단다.
그 공로로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면장을 하라고 하였단다.
하지만 학교 근처에도 가 보시지 않은 무학인 아버지는 그 직을 고사하셨다.
모든 일처리는 아버지 두량으로 할 수 있지만, 글을 모르니 밑에서 엉뚱한 내용으로
아버지를 속이면 그 책임을 뒤집어쓰겠기에 그것만은 맡지 않으셨단다.
공산당이 물러간 뒤 그들에게 협조했던 사람들 수십 명이 죽을 처지에 놓였다.
그중에 몰라서, 영겁 결에 그들의 명을 따랐던 다수의 사람들을 아버지의 탄원으로
구해준 일은 동네 사람들의 증언으로 알았더랬다.
아버지는 조 씨 집성촌인 동네의 규범도 정비하셨고 타성이었지만,
워낙 엄격히 적용해서 따를 수밖에 없었단다.
초상이 나면 온 동네 사람의 출타를 금하였고,
초상이 끝난 후에야 다닐 수 있었으며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사람에겐
무거운 벌금을 물려서 어려운 일에는 온 동네가 합심해야 할 일임을 분명히 하셨더란다.
평소에도 우리에게 혼인이나 환갑잔치 같은 경사와 초상이나
어려운 일을 당한 애사가 동시에 일어났다면 우선순위는 반드시
애사가 먼저여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다.
기운 해를 뒤로하고 달려온 슬픔은 강을 건너와 들을 적시고 빅베어 마운틴을 삼키고,
목을 넘어와 온몸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