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5월의 잡문 #1
흔히 한국 남자의 3대 소울푸드로 꼽히는 메뉴가 있는데, 제육볶음, 돈까스, 순댓국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종류의 인터넷 밈이 으레 그렇듯 특정 성별에 대한 과도한 일반화 내지는 단순화로 비춰질 수 있음에도 누구도 분개하지 않음은 모든 한국 남자들이 해당 진술이 사실임을 명확히 인지하는 탓이다. 모든 한국 남자들이 제육볶음, 돈까스, 순댓국을 좋아한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다만 모든 한국 남자들이 경험적으로 절대다수의 한국 남자들이 제육볶음, 돈까스, 순댓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뜻이다.
나 또한 상기한 절대다수 중 하나라 할 수 있을텐데, 각 음식에 대한 선호에야 분명한 차등이 있다. 순댓국이 첫째, 돈까스가 둘째, 제육볶음이 셋째다. 꼴찌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제육볶음은 물론 맛있는 요리임에 분명하나 차별화의 가능성이 발목을 잡는다. 그러니까 제육볶음의 맛은 경험적으로 일정 수준 내에서 진동한다. 아주 맛없기도 어렵지만 아주 맛있기는 더 어려운 탓에 어쩌다 제육볶음을 사먹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 돈으로 집에서 해먹으면 비슷한 수준의 맛에 고기 양이 두 배일 텐데'라는 말이 - 비록 그러한 종류의 후회가 행복을 산산조각내는 지름길임을 앎에도 - 머릿속에서 불가피하게도 맴돈다. 돈까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찐득한 소스에 푹 절여진 경양식 돈까스도 별미지만, 역시 미식의 관점에서라면 아무래도 두꺼운 일식 돈까스가 최고다. 특히 육향이 진하고 지방이 적당히 익은 로스카츠의 맛은 직접적인 마이야르의 부재에도 어쩌면 돼지고기 요리 중 최상의 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그러나 순댓국에 비할 바는 아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돈까스는 영혼을 울리지 못한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다. 달리 말하자면 순댓국은 '소울 푸드'라는 특권적인 위치를 점하는 반면 돈까스는 그러지 못한다. 단언컨대 순댓국은 내 영혼의 음식이다. 순댓국은 내게 감기약이고 안주이며 해장국인 동시에 어쩌면 벗이다.
어떤 영화 감독을 좋아한다면 그/그녀의 대표작을 섭렵하는 것이 자연스럽듯, 어떤 음식을 좋아한다면 그것으로 유명한 맛집을 가보는 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동의 자유가 생긴 스무 살 이후로 서울 내 유명한 순댓국 맛집을 많이도 찾아다녔다.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성시경 유튜브에 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법한 (혹은 이미 나온) 그런 맛집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고사를 보기 좋게 증명하듯 순댓국을 먹으러 서울 방방곡곡을 들쑤시고 다녔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최고의 순댓국 맛집은 너무나도 익숙한 생활권에 있었는데, 그것이 어디인고 하니 서울대입구역 2번 출구에서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면 있는 '우리가참순대'였다. 1n학번 서울대생이라면 모를 리 없을 테다. 누군가에게는 해장, 누군가에게는 음주, 누군가에게는 혼밥의 성지였을 그곳.
구태여 과거 시제를 반복하여 사용함은 우리가참순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가파른 내리막 계단이 있는 입구야 변함없지만 상호도 가격도 주인장도 순댓국 국물의 맛도 공기밥 무한리필 가능 여부까지 모든 것이 변했다. 아마 이 년쯤 됐을 게다. 그런 탓에 모든 것이 변한 이후로 다만 우리가참순대와 주소를 공유하는 평범한 순댓국집이 되어버린, 더 이상 우리가참순대가 아닌 그곳에 한 번 가보고 나서는 발길을 끊었다. 그야말로 '원 앤 온리'라 할 수 있는 우리가참순대와는 영 딴판이었다. 우리가참순대가 지닌 제일의 매력은 서두에서 제육볶음을 애써 깎아내릴 때 사용했던 차별화에 놓여 있었다. 우리가참순대의 순댓국은 단언컨대 이십수 년의 인생을 통틀어 먹어본 수백 그릇의 순댓국 중 다른 순댓국들과 좋은 의미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한 그릇이었다.
가끔 머릿속에서 순댓국들이 놓여 있는 좌표평면을 그리곤 한다. 싱글 몰트 위스키에 대해서라면 이러한 분류 방법이 유명하다. x축은 바디감에 대하여(라이트함 <=> 리치함), y축은 향의 분과에 대하여(스모키함 <=> 섬세함) 지도를 그리고 위스키를 한 병씩 좌표평면의 적절한 공간에 갖다놓는 식이다. 이를테면 아드벡과 저숙성 라프로익이 4사분면(라이트함 & 스모키함)에 놓이는 반면 고숙성 맥켈란은 정반대의 2사분면(리치함 & 섬세함)에 놓일 터이다. 순댓국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좌표평면을 그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 바디감에 해당하는 x축은 라이트함 <=> 리치함으로 그대로 가져가도 무방하겠고, 향에 해당하는 y축은 깔끔함 <=> 꼬릿함으로 일부 수정이 필요하다. 다진 마늘을 듬뿍 넣어야 매력적인 보라매의 삼거리먼지막순댓국은 1사분면의 끝에 위치할 테고, 구리의 강창구진순대나 선릉의 농민백암순대는 어느 한 쪽으로 쏠리지는 않을 테다.
그래서 우리가참순대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냐 묻는다면 3사분면의 극단, 다시 말해 라이트함과 깔끔함의 극단에 놓인다. 순댓국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3사분면에 속하며 심지어 맛있는 순대국은 대단히 귀하다. 아니, 3사분면에 속하며 맛있는 순댓국을 먹어본 것은 우리가참순대뿐이라고 말하더라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오래된 생각인데, 우리가참순대는 분명 하동관, 옥동식에 준하는 퀄리티를 지녔으며 차별화의 관점에서라면 그들 이상의 독창성을 가진 가게다. 아마 우유보다 진할 다른 순댓국집의 국물과 다르게 가볍다 못해 투명해 그릇 바닥의 빛깔을 투영하는 우리가참순대의 국물은 그 자체로 놀라운 밸런스를 지닌, 완성도 높은 요리였다.
우연의 중요성이야 예전부터 절감하고 있었다만 우연이 틈입할 틈 없는 반복적인 루틴의 중요성 또한 절감하고 있는 요즘인데 이를 의식하기 몇 년 전부터 우리가참순대는 내게 하나의 루틴이자 리츄얼이 되었다. (상기한 순댓국의 맛을 제외하고) 우리가참순대의 눈에 띄는 특징이라 하면 세 가지 정도였을텐데, 첫째로 맛보기 머릿고기가 두세 점 나온다는 점, 둘째로 (우스갯소리로 국밥집의 퀄리티를 결정한다고 하는) 새콤한 깍두기의 맛이 일품이라는 점, 셋째로 공깃밥 무한리필로 밥을 마음껏 가져다 먹을 수 있다는 점이겠다.
미식가이자 대식가인 내게 둘 중 하나라도 놓치는 것은 영 아쉬웠기에 나만의 식사법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맛보기 수육과 아삭한 깍두기를 곁들여 공깃밥의 삼 분의 일 정도를 먹고, 순댓국이 나오면 순댓국 안의 고기를 쌈장 혹은 새우젓에 찍어서 남은 삼 분의 이를 함께 먹는다. 그러면 작은 고기 조각들이 떠다니는 국물이 남는데, 공깃밥을 한 그릇 더 시켜 국물에 말아먹으면 비로소 든든한 식사를 한 느낌을 받는다. 웬만해서 순댓국에 다대기를 넣어 먹지는 않는 편인데, 이따금씩 국물에 말아둔 두 번째 공깃밥을 반 정도 먹어갈 즈음 다대기를 풀면 새로운 맛이 즐겁게 다가온다. 만으로 육 년 동안 셀 수 없이 방문한 우리가참순대에서 선배들과 함께 자리한 첫 몇 번의 식사를 제외하고는 이 루틴이 항상 지켜졌다. 일류 보디빌더도 육 년 동안 똑같은 루틴을 유지하긴 어려울 터인데, 나만의 우리가참순대 루틴이 선사하는 만족감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참순대는 사라졌지만 루틴이야 남아 최근 방문하는 다른 순댓국집들에도 적용해보곤 한다. 물론 그날따라 배가 부르다거나 순댓국 맛이 영 꽝이라거나 시간이 없다거나 하는 이유로 루틴을 생략하고 평범한 취식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만 대부분의 경우, 심지어 (우리가참순대와 달리) 공깃밥 한 그릇에 천 원을 받는 식당이라 할지라도 루틴에 따르곤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참순대와의 옛 추억은 다만 미식 생활에 남은 루틴을 통해 반추될 따름이다. 글로 옮기고 보니 퍽 낭만적인데, 옛 연인과의 사랑이 현재의 삶에 남긴 흔적을 보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전의 인심 좋았던 우리가참순대 이모님들을 다시 마주하는 날 나는 어쩌면 <라라랜드>의 세바스챤과 미아가 그러했듯 아련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