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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우총 Sep 15. 2022

이방인

뫼르소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심리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이방인'은 주인공 뫼르소의 관점에서 뫼르소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쓰인 소설이다. 줄거리를 요약해보자면,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새 친구들과 여자 친구를 만나고, 그러다 우발적으로 아랍인 한 명을 살해한 죄로 감옥에 가서 재판에 넘겨지는 내용이다. 사실 이 소설의 특징은 내용의 기승전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사건들을 바라보는 뫼르소의 생각, 관점, 그리고 은연중에 드러나는 부조리함이다.

 

 작중에서 보이는 뫼르소의 생각은 놀랄 정도로 객관적이고, 감정 배제적이며, 무신경하다. 양로원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도 귀찮아서 설명하기를 꺼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어머니의 관을 열어보고 감정에 사무치는 소요 또한 귀찮아하여 관을 열어보지도 않고 식을 진행하였으며 눈물 하나 흘리지 않는다.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에서도 자신을 사랑하느냐는 질문에는 아마도 아닌 것 같다고 말하지만 결혼할 거냐는 질문에는 원한다면 가능하다고 대답한다. 아무런 감정 없이 아랍인을 총으로 쏘고, 그 자리에서 네 발의 탄을 더 꽂아 넣는다. 결정적으로 그는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던 살해 동기에 관해서는 "그저 햇볕이 눈부셨을 뿐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조금 더 줄거리에 관한 말을 해보자면


 그는 감정에 의해 소요되는 것들을 불필요하다 생각한다. 그는 어머니를 뵈러 버스를 타가며 양로원에 도착했지만, 관리인이 관을 열어주냐는 말에 잘못 대답하고, 이를 굳이 고치기가 귀찮아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않는다. 정말 고치기가 귀찮았을까? 나는 뫼르소는 한 번 잘못 대답하고 이를 고치면서 보일 자신, 어머니의 장례식에 '통상적으로' 맞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자신을 타인이 어떻게 볼지를 생각하고 고치지 않은 거라 생각한다. 이후에 어머니의 나이를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걱정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뫼르소는 자신의 어머니의 장례식이 어제였다는 것보단 나흘이나 쉬게 된 회사, 저번에 회사에서 본 한 여자, 그리고 지친 몸을 휴식할 해변을 생각한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어머니의 장례식은 끝났으니. 마리와 해변에 있을 때, 또 한 번 말실수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하기 마련이니까."  살인죄로 재판을 받기 전, 그는 예심판사가 후회를 하느냐는 질문에 진정한 후회라기보다는 귀찮은 감정이라고 말했다. 재판을 받고서는, 뫼르소는 죄책감에 대한 신부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내 죄가 무엇인지 모르며,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남들이 나에게 가르쳐줬을 뿐이고, 그러므로 이렇게 죗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무언가 조금 이상하다. 뫼르소는 분명 타인에 대한 관심이 없지만, 한편으론 관심이 있다. 그것은 바로 타인들의 시선이 형성하는 사회적인 '나'이다.


 






우리는 굳이 남을 쳐다보려 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생각을 보이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나는 책을 읽을 때만큼은 그의 논리에 큰 이상이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의 생각을 따라가는 일은 생각보다 유쾌한 일이었고,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나는 그의 비정상적으로 무관심한 태도에서 동질감과 비슷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인가? 소시오패스적인 그의 태도에 이러한 감정을 느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불쾌하게 느껴졌다.


 여러 개인 매체들의 발전과 함께 우리는 점점 더 자신의 '개성(個性)'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중요시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내 생각에는 이를 표출하는 것에 중점이 맞추어져 가고 있다. sns에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공유하고 싶은 나의 모습들을 올리게 된다.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생각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타인이 바라보는 우리의 모습을 더 신경 쓰게 된다. 마치 주변인들이 죄인이라고 말해서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 뫼르소처럼, 우리는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들을 올리면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개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개성을 강조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타인에게 무관심해졌다. 타인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면서, 우리는 뫼르소처럼 감정적인 무언가를 혐오하게 되는 정서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정말 많은 예시들을 들 수 있다. 소위 '떼법'이라 불리는 국민정서법들, 장애인 연합회의 시위, 노동조합들, 환경단체들에 대한 인식....... 이들에 공감하고, 궁휼히 여기는 시선을 단순히 선동, '중우(衆愚) 정치'의 산물이라 생각하는 여론이 인터넷을 지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인터넷에서의 특징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다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 작품에 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이 소설에서, 뫼르소는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그는 알제리 태생인 프랑스인이었으며, 그의 애인과도, 친구와도 감정적으로 엮이고 싶지 않아 했다. 심지어 그는 소설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과 자신의 감정도 분리하려고 노력하였다. 자기 자신에게도 이방인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마지막에 사형대 앞에 서서야 자신에 대해 솔직해졌지만 말이다. 나는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 현대인들의 마음을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그 어떤 역사 속의 순간보다 타인과 빠르게 연락할 수 있게 된 현대에서, 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서로와 동 떨어진 '이방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감정에 솔직해진 사람들, 우리들을 그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는 것일까.


그렇게 모두가 서로에게, 나 자신에게, 이방인이 되어가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인 것일까?
























*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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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턴 기록용이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 군대에 있으면서 갑자기 명작들을 읽게 된 배경, 이 작품에 대해서 드는 부가적인 생각들이 차지하는, 저 창 밖에 보이는 창고 같은 역할이다.


군대에 들어오고 자대 배치 전까지는 책은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태우기 위한 용도였다. 그런 김에 책을 읽을 거면 이름만 들어도 아는 명작들을 조금씩 읽어보자는 정도의 마인드였다. 근데 읽어보니까 그런 작품들도 생각보다 재밌고, 생각할만한 것들을 많이 던져주다 보니까 자대 와서 남는, 넘쳐나는 시간에 내 생각들을 정리할 글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글을 잘 쓰냐고. 위에 쓴 글이 제대로 된 구조나 논리를 갖추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고, 너무 여러 번 첨삭은 하려고 하지 않는 편이다. 첨삭을 하다 보면 무슨 테세우스의 배 마냥 첫 생각과 나중 생각이 달라지기 때문에, 너무 오랜 기간 동안 글을 잡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뭘 쓰고 싶은지는 이미 다 정한 뒤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 잘 쓰고 싶기도 하다. 내가 예전에 유튜브를 시작하면서 해보고 싶었던 일의 정확한 예시가 '마이너 리뷰 갤러리' 채널이다. 인터넷 문화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사회 현상들을 내 나름대로 분석하고 생각해본 것을 녹음해서 적당히 편집한 영상들이다. 왜 안했냐. 모르겠다. 대본을 쓰는 것도 너무 마음에 안들었고, 내 발성도 마음에 안들어서 관뒀다. 여기 와서 생각해보면 왜 시도조차 안하고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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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4

이 글을 잡은 지도 상당히 오래됐다. 중간에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준비를 한답시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국사도 재밌게 공부하고 잘 마무리지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첨삭하고 마치려고 한다. 요즘은 JLPT를 보겠다고 기초 일본어 책을 두 권이나 샀다. 2급을 따기 전까지 돌아올 진 모르겠지만, 데미안 감상평은 마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김에 저 작가 신청 버튼도 눌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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