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진로 관련 검사를 하면 늘 언어능력이 높은 수치를 보였다. 그에 따른 추천 진로에는 꼭 작가와 아나운서가 함께 쓰여있었다. 물론 참고 용도로만 사용하면 되는 검사지만 어린 나는 한숨이 나왔었다. 나는 말을 잘 못 하는데 아나운서라니, 말까지 잘해야 언어능력이 높다고 할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아는 사람 중에 내가 글을 잘 쓴다는 데에 동의하는 이는 몇 있을 수 있지만 말을 잘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자주 더듬고 단어를 빼고 말하고, 상대와 일관된 주제로 유연한 대화를 나누기도 어려워한다. 나는 이런 점 때문에 오랫동안 나의 언어적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왔다. 뿐만 아니라 상대의 말을 잘 못 알아듣기도 해서 여러 번 되묻고 끝내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겉으론 알아들은 척을 하며 속으로 나의 청력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ADHD 진단을 받자 이 문제들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도 주의력의 문제라고 한다. 글을 읽을 때도 두세 번 읽어야 하는 판에 빠르게 지나가는 말은 어떻겠는가. 나는 언어 기능에 장애가 있다기보단 주의력에 장애가 있었다.
친구와 바닥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운동화 한쪽의 닳다가 터진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방금까지 나누던 이야기에서 튕겨 나와 운동화의 한 부분만 닳게 되는 나의 걸음걸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느닷없이 바뀐 대화 주제에 상대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의 대화는 주로 이런 식이었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태 나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이를 지적하는 대신 조용히 대화를 발전시키기를 그만두었고, 이 사실을 깨닫는 데에 한참이 걸렸다. 사람과 눈을 잘 못 마주치는 탓에 대화 중에도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그 와중에 눈이나 귀를 잡아 끄는 무언가가 감지되면 생각의 흐름은 곧바로 새 물꼬를 터 흘러가기 시작한다. 의식으로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생각 줄기에서 손에 잡히는 것 아무거나 잡아다 말로 뱉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입 밖으로 나오는 말도 의식의 속도보다 빠른 것 같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셨어"라는 문장을 예로 들어본다. 머릿속에서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셨어"라는 문장을 생각하며 말을 한다. 당연히 생각은 말보다 먼저 문장을 완성한다. 그러면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돌림노래를 부르다가 박자가 틀려버린 것처럼 "어, 아버지가... 들어가셨어, 방에"가 된다. 단어를 하나씩 빼고 말하다가 뒤늦게 덧붙이는 식이다. 한국어가 어순에 큰 영향을 받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 문장에 주어 목적어 서술어 같은 어순은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는 정돈된 문장을 곧잘 구사하지만 입말은 언제나 뒤죽박죽이다.
이런 모습은 대화가 무르익을수록, 즉 빠른 대화가 길게 이어질수록 자주 나타난다. 더듬고 단어를 잘못 말하고 맥락 파악 없이 끼어들기를 반복한 후에 남는 것은 후회다. '오늘도 너무 나댔다'. 다시 움츠러들곤 한다. 내 대인관계에 소극적인 태도가 자리 잡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대화를 잘 못한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읽거나 들은 내용을 출력할 때도 어려움이 있다. 글을 읽고 이해한 뒤에도 핵심 단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이 때문에 정확한 용어 사용을 요구하는 서술형 시험은 언제나 고통이었다. 내용을 이해했기 때문에 대략적인 의미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점수를 얻을 수 있는 키워드는 결국 빠트리고 작성하여 감점당하고는 '이 말이 그 말 아니냐'며 억울해하곤 했다. 단순히 공부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까? 누군가의 말을 듣고 인상 깊은 문장을 기억해 둬도 말이나 글로 옮기려 하면 추상적인 의미만 남고 실제 그가 사용한 단어가 떠오르지를 않으니, 공부할 때만 방해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전달 사항을 듣고도 조금 긴장을 늦추면 문장 자체를 통째로 잊기도 한다. 그래서 혹여 그 뜻을 곡해하게 만들까 봐 다른 사람의 말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가 늘 조심스럽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네, 네" 하지만 돌아서면 무엇을 시켰는지 잊어버려서 다시 물을 때면 얼굴이 붉어진다.
음성 언어로 하는 대화가 너무 어려워서 세상 사람들이 전부 말풍선으로만 대화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문자 기반의 대화도 짧고 빠르게 쓰는 SNS나 카카오톡을 사용하다 보면 비슷하다는 현실을 깨닫는다. 요즈음에는 약물 치료를 받으며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대화 주제가 급선회하는 경우는 훨씬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어렵다. 현재 진행형인 데다 대인관계를 방해해서 자존감을 깎아먹으니 이에 대한 글을 쓰다 보면 자꾸 증상만 늘어놓은 채 어려움과 억울함을 배설하게 된다. 그래도 확실한 점은 대화가 어려워서 잘하지 않을 때 능숙함이 더 떨어지는 악순환이 쉽게 발동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말을 하고 무엇인가를 기억하려고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