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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섭 Feb 08. 2023

도시의 불빛은 아름답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년 전 미국 서북부의 끝 시애틀(Seattle)이라는 도시에서 잠깐 머문 적이 있다. 그 도시의 여름 대낮은 유난히도 길었고, 밤하늘의 별은 서울보다 많았다. 미국에서도 은퇴 후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힐 정도지만, 반대로 우기가 길어 자살률 1위를 겪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난생처음 바다건너에서 마천루 불빛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이야 도시의 화려한 불빛이 일상이 되었지만, 그때 빌딩 불빛을 잊을 수 없는 건, 바닷물에 비친 데칼코마니 같은 건물 빛 환영 때문이었다. 물 위에 떠 있는 크리스마스트리 같아서 마냥 신기했고, 그때 내게 익숙했던 서울 집 앞 골목 가로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사치스러웠다. 건물이 내뿜는 수많은 사람들의 체온 같은 미려한 불빛이 그들의 넋으로 투영이 된 듯 보였다. 맥없이 돌을 던져 바다에 드리운 음영을 흩어지게 했지만, 이내 허망한 짓이라 깨달았다. 자포자기를 하듯 하염없이 바라보다, 이내 어릴 적 집 앞 가로등에 쌓인 추억으로 빠져 들곤 했다.

내 친한 친구들은 모두 동네 골목에서 만났다. 우린 집 앞 골목 가로등 밑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손 야구니, 술래잡기를 했다. 어머니가 꾀꼬리 같은 생 목소리로 나를 부르면, 친구들에게 작별인사 없이 집으로 약속하듯 발길을 돌렸다. 그 골목은 사람의 숨을 품을 만큼 가까웠다. 친구 집 앞이라도 지나갈라 치면 그 집에서 새어 나오는 담장 안 불빛과 냄새만으로도 저녁반찬이 무엇인지 알았다. 우리가 조금은 성숙해진 어느 날, 한 친구의 좋아하는 여학생 집 앞 가로등 밑에서 술에 취해 “미래의 장모님께 인사드립니다” 라며 엄한 대문 앞에 장난치듯 단체로 절을 한 적도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집 앞 골목 가로등 밑에 모여 한참을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다 못해 담배도 피웠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이면 그 등에 비친 눈은 벚꽃처럼 흩날렸고, 종종 그 밑에서 은밀한 연애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추억을 서낭당 앞 돌탑을 쌓듯 그 골목길 불빛에 남겨 놓았다. 우리는 한동안 그 가로등 불빛을 어른이 되어서도 떠나지 못했고, 그 후로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생활에 쫓겨 아파트의 불빛으로 찾아 들어갔다. 



아파트 불빛 아래에서 지금도 이 글을 쓰지만, 난 감히 창 밖을 쳐다보지 못한다. 한밤중 창 밖 풍경은 커튼이나 블라인드로 가려진 앞 아파트 뒷방 불빛을 연속적으로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공상에 잠겨 창 밖을 내다보고 있자면, 누군가에게 농밀한 시선으로 남의 집이나 훔쳐보는 파렴치한으로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이쯤 되면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일조권만 약간 보장되면 땅값이 아까워 여백의 미를 무시한 채 마구 지어 올린 건축업자들이 원망스럽다. 커다란 우리 집 창은 앞집에서 누군가 지켜보는 것이 두려워 또 다른 벽으로 가리기 일 수이고, 그 덕에 일조권은 더 보장이 안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이젠 아파트에 사는 건 서로에게 삶의 흔적을 가리려는 필사적 노력이 필요한 곳이 되어 버렸다. 가끔 난 어릴 적 집 앞 골목길의 가로등 밑 사람의 향기가 오히려 그리울 때가 있다.   


그렇다고 아파트에 사는 것이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른이 되고 보니, 내 통장은 텅장이 되어 있어도, 문득 뉴스에서 아파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른다는 소식을 접하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부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거기에 어릴 적 살던 집에 비하면 온수나 난방은 내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저축한 돈처럼 꽐꽐 나왔다. 하지만, 쓰고 난 후에 올라온 고지서에는 진짜 돈으로 갚아야 하는 비극이 야누스처럼 도사렸다. 가끔 윗집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만 감내할 줄 아는 도의 경지에 오르면, 온전히 비밀이 보장된 완벽한 공간이기도 하다. 요즘은 LED등 때문에 전기료도 얼마 나오지 않아, 예전처럼 아끼려고 집 안을 동굴처럼 만들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집집마다 마치 아파트의 불빛 밝기가 부의 척도라도 되는 양 여기저기 경쟁적으로 밝히고 있다. 거기에 아파트에 귀신이 나올 턱이 없는데도, 현대인의 불안을 핑계로 부엌불이라도 켜고 자야 안심이 된다. 외출을 하려고 하면 각종 CCTV와 첨단 보안장비들이 돌보는 아파트에 도둑이라도 들 까봐 거실 불정도는 살포시 켜고 나가는 센스는 상식이 되었다. 그러니, 어느 집 아파트 불빛이 꺼져 있으면 마치 이 빠진 치열처럼 난 곳이 훤하게 표가 나기도 하고, 생활의 흔적은 전등 빛 하나에 사그라지기도 한다.



인간은 고대로부터 불을 보면 안정감을 찾았다. 사냥을 하고 오면 동굴 안 모닥불을 보면서 그날 있었던 사냥의 아슬아슬했던 위험을 떨쳐냈었고, 현대인들은 직장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TV나 휴대폰의 불빛에 의존해 심리적 안정을 찾으려 한다. 그런 이유에서 인지, 지금도 캠핑을 가면 불멍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이쯤 되다 보면, 인간은 불빛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보았던 시애틀 마천루의 불빛, 어릴 적 추억이 담긴 골목길 가로등 불빛, 그리고 내가 사는 아파트의 불빛들은 어찌 보면 그저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 하지만, 그것들이 의미 있는 이유는 인간에게 주는 안정감 보다 스쳐간 옛사랑처럼 추억을 만들어 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추억들 중에는 추악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도시의 불빛은 언제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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