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예연 Jun 21. 2022

소녀 같은 할머니가 되고 싶어

잡고 있던 손을 놓친 부부에게

매번은 아니지만 남편이 쉬는 주말 아침은 식사로 빵에 커피를 곁들입니다. 빵집에 다녀오는 일은 남편이 주로 맡고 그 사이에 저는 커피를 내립니다. 남편이 고심해서 골라온 빵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날도 있어요. 그래도 가능하면 진심을 담아 ‘맛있는 빵 배달해줘서 고맙습니다!’ 하고 눈치채지 못했을 애교를 넣어 고마움을 표현합니다. ‘사 왔어? 얼른 먹자’ 같은 실용적인 언어를 쓰는 날도 있지만 가능하면 언어와 태도를 고르곤 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유독 빵을 사 오는 날 이러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임신 중에 읽었던 <프랑스 아이처럼>의 한 구절 때문인데요. 빵을 먹는 아침이면 떠오르는 구절입니다.



"사이먼과 나는 시골에 사는 엘렌과 윌리엄의 집에 초대받았다가 우리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 우리가 갔던 그 주말 아침에 윌리엄은 집 근처 빵집에서 딱딱한 바게트를 사 왔다. 아이들과 함께 서투르게 빵을 자르고 달걀 프라이를 구웠다. 엘렌은 흐트러진 머리에 잠옷 바람으로 내려와 식탁에 앉았다.

와 나 이 바게트 정말 좋아!” 엘렌은 빵을 보며 천진하게 외쳤다.

소녀 같은 기쁨. 그 단순한 희열이 우리 부부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소녀 같은 기쁨’을 책에서 만난 순간, 이건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굳게 결심했어요. 그 당시에도 소녀의 모습은 흔적이 남은 수준이었지만, 그렇기에 더욱 그 대목에 집중할 수 있었어요. 어디선가 보았던 순수하게 웃으시는 할머니의 모습도 떠올랐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부부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고백하자면 현실은 소녀의 것과는 결이 다른 어른의 기쁨이 나오거나 예리하게 잘못된 일만 골라내어 집안 공기를 훅 떨어뜨리기도 해요. 이렇게 완벽하지는 않지만 “정말 좋아!”를 외칠 수 있는 기분만은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작은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만드는 것이 일상을 아름답게 한다고 믿거든요. 여행과 같이 특별한 이벤트도 좋지만, 매일 쌓이는 일상의 힘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모처럼 떠난 여행에서 와르르 무너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손을 잡고 산책하는 노부부를 볼 때면 미소가 지어집니다. 결혼식을 할 때만 해도, 아니 신혼 때만 해도 당연히 그런 모습으로 함께 나이 들어갈 줄 알았는데 아이를 낳고 일상이 조금씩 무거워지기 시작하니 어느덧 소녀 같은 모습은 지워지고 엄마의 모습이 짙어집니다. 아이 손을 잡고 걷는 것이 익숙해져 어쩌다 부부가 나란히 걷게 되어도 뒷짐만 지고 걷는 날이 많아집니다. 한번 놓친 손은 다시 잡기가 왠지 쑥스러워지는 날도 있어요. 육아 퇴근 후 찾아오는 자유시간에 서로 핸드폰만 쳐다보는 날이 늘어납니다. 이렇게 가족이 되어가는 거라 생각하기에는 무언가 몹시 아쉬운 마음이 됩니다.


오랜만에 남편에게 선물을 하고 싶어 졌습니다. 요즘 심적으로 힘들어하는 남편을 위해 책 한 권을 구입했어요. 생각해보니 함께 지낸 10년 동안 책 선물은 처음이더라고요. 최근 나눈 고민거리에 도움이 될까 싶어 이 책 저책 뒤적여 고른 책 앞부분에 짧은 메모도 남겼습니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편이라 걱정을 많이 했는데, 처음으로 받은 책 선물에 감동을 받은 것인지 틈틈이 소감도 남기면서 하루 만에 완독을 하더군요.


반면 저는 남편에게 꽃 선물을 자주 받는 편인데요. 성격이 아기자기하지는 못해 포장채로 드라이플라워가 되기 일쑤예요. 그런데도 처음 만난 날이나 생일이면 어김없이 꽃을 들고 집에 들어옵니다.

아마도 제가 빵을 보고 기뻐하는 것처럼 기념일엔 꽃을 선물하려 ‘노력’ 중일 거예요. 연인들처럼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는 않을 수 있어요. 평소랑 다르게 조금 부자연스럽고 노력하는 느낌이 들면 뭐 어떤가요. 부부가 만들어낸 작은 노력들은 둘 사이의 틈을 메워 매끈하게 만들어 주는걸요.


몇 년 전 한 친구의 작은 노력이 생각납니다. 먼저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며 매일 출근 뽀뽀를 한다고 했어요. 심지어 전날 싸웠더라도요. 아무래도 ‘작은’은 취소해야겠어요. 난이도가 좀 높군요.

부부가 한번 멀어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고, 서로 늘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인 이야기도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친구의 이야기를 하고 보니 앞선 저의 빵 이야기가 머쓱해지네요. 쌍둥이를 키우고 있는 그녀가 여전히 출근 뽀뽀를 나누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작가의 이전글 서른다섯, 서른하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