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잠의 힘
친구가 학원을 개원했다. 나름 큰 사업에 설렘 반 걱정 반인 친구를 응원 겸 축하하기 위해 운전대를 잡았다. 도착 직전 신호에 걸려 위치를 확인하다 학원 유리벽에 큼지막히 붙은 학원명이 눈에 들어왔다. 학예회를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처럼 살짝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핸드폰을 꺼내 학원 건물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6개월 뒤 다시 친구를 만났다. 몸에 붙어있는 낯선 명품들이 눈에 들어오는 걸 보니 사업이 잘 풀렸음이 확실했다. 평소 2만 원의 밥값도 더치페이가 좋다며 계산하려는 나를 말리던 친구는 그날의 식비며 커피와 디저트 비용 모두 호탕하게 계산했다. 돈 많은 언니가 쏜다는 멋진 말과 함께.
인생에 큰 일을 겪으면 인간관계가 정리된다는 말은 결혼식을 겪은 직후의 사람들에게 많이 듣게 된다. 물론 봉투에 담긴 금액이 예상을 빗나갔을 때 이기도 하지만 묵직하게 느껴지는 마음의 무게를 뜻밖인 인물로부터 전달받았을 때이기도 하다.
아마도 뭉클하게 셔터를 누르던 내 마음이 잘 전달된 모양이다. 그날의 방문과 축하가 기억에 많이 남았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종종 북적이던 그룹채팅방이 형식적인 축하말 뒤로 눈에 띄게 조용해지고, 살짝 생긴 여유로 베푼 일에 불편한 기색을 보인 이도 있었다고 했다.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니 좋은 마음에서 시작한 베풂도 신중히 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나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들기 전 생각을 정리하다 남편에게 물었다. 타인의 좋은 일에 왜 진심 어린 축하가 어려운 일인지.
'자존감'이라는 의외의 단어가 등장했다.
자존감이 낮으면 열등감이 작동하여 질투가 나고 결국 축하할 마음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평소 나에게 자존감이 높은 편이라고 말하던 그는 자존감이 낮아 타인에게 종종 질투가 난다고 고백했다. 내가 자존감이 높은가, 생각을 해보니 확실히 전에 비해 든든해진 마음이 느껴졌다. 분명한 것은 한결같이 높은 자존감과 지낸 건 아니었다는 거다.
몇 년 전 많은 이들에게 읽혔던 <미움받을 용기>를 아파오는 마음을 달래 가며 읽었고, 그 무렵 서점에 깔려 있던 심리학 서적을 열심히 뒤적였다. 대한민국엔 나처럼 자존감이 낮은 채로 고군분투하는 청춘들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감정은 밀어 둔 채 규칙 안에서만 움직이기를 바란 시대가 키워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이제와 과거를 원망하며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공부해서 키워지는 것이라면 열심히 공부해서라도 키워보고 싶었다. 주저앉은 자존감이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한 건 ‘혼자 있는 시간’의 진가를 알게 되고 나서부터 였다.
사람을 좋아해서 함께일 때 에너지를 얻는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퇴사 후에 지인 하나 없는 지역에서 백수 겸 임산부가 되었고, 임신 기간 내내 멀미 같은 입덧이 들러붙은 탓에 동네 산책이 전부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 당시 남편은 툭하면 삼사일 씩 출장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혼자 적막한 시간 속에서 쉽게 우울해지고 외로워졌다. 그간 혼자서도 시간을 곧잘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든 누군가를 만날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이 받쳐주고 있었기에 부렸던 허세였나 보다. 그렇게 혼자 시들시들해지고 있을 무렵 운명처럼 사이토 다카시의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이란 책을 만났다.
나는 침잠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물속 깊숙이 잠기면 무음의 세계를 떠도는 듯한 고요함에 휘감긴다. 그 고요함 속에서 혼자 무언가에 몰두했다고 하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물 위에 떠오른 뒤에도 자기 안에 존재한다
-사이토 다카시 <혼자 있는 시간의 힘>
‘침잠’이라는 두 글자가 만들어낸 침착한 강렬함은 이내 매료되었다. 침잠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필사를 해 두고 적어 놓은 노트를 외로움이 올라올 때면 읽고 또 읽었다. 그 덕에 배속에 아이와 함께 평생 잊지 못할 고요하고 내면이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비록 출산 후 이어진 육아는 쉽지 않았지만, 젖먹이 아이를 재우고 읽는 책은 꿀맛이었고, 아기띠 속에서 반쯤 잠든 아이를 안고 했던 영어공부는 육아로 잊히던 나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영원을 약속하던 저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점 같던 시간은 쌓여 선명한 선을 만들어 냈다. 나를 알아가는 시간은 밍밍하던 자아가 제 맛을 내도록 했고, 나에 대한 믿음이 생기니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 시도하며 내 세계를 넓혀가는 일이 즐거워졌다. 운명 같던 글귀에 의지해 만들어간 침잠의 시간은 매일 공급되지 않으면 하루가 제대로 안 굴러가는 커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자신을 평가하는 정도가 자존감이라고 한다. '혼자만의 시간을 쌓아 나가는 나'는 'sns 속 타인의 삶을 덧없이 들여다보던 나'보다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다. 나를 사랑하게 되면 '~라도 괜찮아'같은 이름으로 위로와 공감의 손길을 뻗는 책을 쿨하게 지나칠 수 있다. 스스로 믿는 사람은 조금 무너져도 자기 회복력이라는 든든한 친구에게 위로를 받는다. 지나간 청춘을 그리워할 일도 없어진다. 한층 성장해 있을 나의 5년 뒤, 10년 뒤를 그리며 신나게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이제는 남편의 늦은 귀가에 더 이상 휴대폰만 쳐다보지 않는다. 다만 2인분의 널찍한 침대에서 홀로 책을 읽는 즐거움이 그 시간을 차지하고 나니 그의 귀가 시간이 궁금하지 않은 부작용이 조금 맘에 걸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