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하이트 <바른 마음> 왜 진실은 무기력하고, 평판은 살아남을까
한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었다. 하버드 대학 철학과 강의 내용을 엮은 정치철학책. 결코 이해하기 쉬운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인문학 서적 최초로 베스트셀러에 올랐었다. 분명 흥미로운 책이긴 했지만 유독 한국에서 열광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오죽하면 저자마저 “왜 한국 사람들이 이토록 정의에 관심을 가지는가?” 하고 의아해할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이렇게 해석했다.
“한국 사회에는 정의가 죽었다.”
건국 이래 역대 대통령이 하나같이 감옥에 가거나 검찰 수사를 받는 나라. 정의가 자취를 감춘 듯한 사회에서 어느 정치철학자의 모범 답안지를 빌려서라도 결핍을 채우고 싶었던 간절한 마음이 사람들을 서점으로 몰리게 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옳고 그름에 관심이 많다. 조금이라도 ‘올바른’ 세상, 나와 같은 ‘정의로운’ 신념을 가진 이들이 잘 나가는 세상을 원하니까.
하지만 그 어떤 인문철학이나 자기 계발서를 읽어보아도 현실 앞에서 신념과 진실은 맥없이 고꾸라지기 일쑤다. 왜냐하면 일상에서 마주하는 도덕적 딜레마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하는가?",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존귀한가?”와 같이 거창하고 대의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대개 이런 심적 갈등이 우리를 기다린다:
- 팀 프로젝트에서 무임승차자의 이름을 지울까 말까
- 딱 봐도 안될 게 뻔한 일에 직언으로 찬물을 끼얹을까, 아님 그냥 모른 척할까
- 윗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꽃같이 조용히 앉아 있을까, 의문을 던져볼까
- 적당히 진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해서라도 성과를 낼까, 양심을 지킬까
여기엔 욕을 먹더라도 협업의 기강을 바로 세우겠다는 사사로운 정의감,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마음으로 장단이나 맞추면 될 걸 굳이 깨버리는 못된 오지랖, 입 다물고 가만히 입다 무는 게 뭐 그리 힘드냐는 체념, 성과를 내면 다행이지 양심의 죄책감은 사치라는 자기 합리화의 마음이 서로 얽히고설켜있다.
이런 순간에도 나는 "내가 한 선택이 옳고, 반대는 틀리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과연 옳고 그름이란 무엇이며, 변하지 않는 진실은 존재할까?
우리 조상들에게 가장 생존에 유리한 방법은, 누가 무엇을 왜 했는지, 그 진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는 데 뇌의 모든 힘을 쓰는 것이었을까? 그것은 우리 조상들의 생존에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달려 있다: ‘진실’ vs ‘평판’.
우리는 진실이 곧 정의라고 믿는다. 옳은 말을 하면 세상이 박수를 칠 거라고, 정직함이 결국 이긴다고. 그게 우리가 배우고 자란 ‘정답’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진실을 아무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 의심한다. 말해봤자 통하지 않을 거라는, 말하는 순간 관계가 깨질 거라는 뿌리 깊은 불신 속에서 산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처럼 진실이 관계를 위협할 수 있는 주제는 아예 대화 목록에서 삭제한다. 진실보단 침묵을 지키는 편이 내 평판을 높여주고, 안전한 사회적 평판이야 말로 나의 생존가능성을 보장해 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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