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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Jan 25. 2024

사랑하고 슬퍼지는 존재

반려동물과 다시 함께 할 수 있을까?


 반려동물의 역사는 거북이로부터 시작됐다. 거북이도 강아지처럼 두 마리를 키웠는데 나는 많이 어렸고 밥을 주는 것과 물을 갈아주는 것을 가끔 해주는 것 외에는 부모님이 거진 케어(?)를 해주셨기 때문에 난 키웠다고 말할 자격이 없긴 하다. 거북이들은 내가 학교인지 어디에서 외박하는 일정을 다녀와서 사라져 있었다. 키우기 힘들어서 어디로 보내버렸다는 그 말을 굳게 믿고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었던 부모님을 원망하며 자지러지게 울었다. 아주 한참 나중에 알고 보니 거북이들은 왜인지 죽었던 거였고 내가 충격을 받을까 봐 에둘러 말한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도 부모님과 대화할 때 가끔씩 더욱 잘 관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이야기할 때가 있다.


바야흐로 1998년, 케이지에서 나온 무리 중 눈에 띄게 소심하고 조심성 많은 몸짓으로 내게 다가와 가장 억울한 눈을 하고 있던 그 녀석이 안쓰러워 데리고 오고 싶었다. 아마 강아지 MBTI 테스트를 했으면 E들 가운데서 독보적 I 아니었을까? 믿기지 않게 작은 아기 강아지와 쿵쾅거리는 심장을 안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달빛을 바라보며 그 애에게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쎄라'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르고 '노을'이가 예상치 못한 식구로 찾아왔다. 엄마가 동물병원에서 마주친 노을이는 당시 보호자였던 아줌마가 본인의 남편이 입질하는 녀석을 패대기치며 버리려고 해 제안을 해서 데려온 아이다. 달달 떨리는 몸, 피멍이 들기 전 하얀 털이었을 귀와 두려움에 가득 차 지옥에서 꺼내달라고 외치는 동그란 눈을 엄마는 도저히 외면하지 못하고 데려오게 된 것이다.


연도를 보면 눈치를 챘겠지만 나의 온 10,20대를 함께 한 이들은 이 세상에 없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나는 10년이 다된 지금도 눈물을 좔좔 흘리고 있다. 내 생에 가장 가깝고도 충격적인 이별이었다.







그 후로 다시는 내 남은 생에 반려동물은 없을 거라고 결심했고 선포하며 다녔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이상하게 생채기가 낫지를 않는 기분이었다. 자기 전에, 아침 눈 뜨자마자 문득문득 갑자기 떠오르고 마는 장면들에 베개를 수없이 적셨다.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의 순리인 것을 머리로는 알 수 있었지만, 외동딸인 내가 어디 나가면 자주 듣는 질문(심심하지 않냐, 외롭지 않냐)에 언제나 "강아지 동생들이 있어서 괜찮아요."라고 말할 수 있던 존재가, 내 침대 맡 잠자리로 항상 찹찹찹찹 발톱 소리를 내며 돌아오던 존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린 사실은 언제나 슬픈 것이다.


"오 하나님, 이리도 사랑스럽고 인간이 인간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방법으로 위로받을 수 있게 또한 절친한 친구로 만드신 점은 잘 알겠사오나 수명은 왜 이렇게나 짧게 만드신 거죠?"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결혼을 하면서, 본가에선 거의 금기시되어 있는 키우던 강아지들 예전 사진 보기가 가능해졌고, 나의 아픔과 충격에 대해 배우자와 자유롭게 대화하게 되면서 이전에 없던 마음이 조금씩 생겼다. 가족 모두가 펫로스 증후군이라는 신조어가 어떤 걸 의미하는지 체감하듯 조용히 우울을 견딘 날들이 많았고, 아무리 키우고 싶은 마음이 생겨도 슬픔을 원격차단하기 위해 누름돌을 올려두었다. 여러 가지 키우면 안 되는 이유들을 앞세워 내 인생에 강아지들은 그 둘 뿐이라고 엄포하며 타투로 새기려고까지 했다. 언젠가 그 모습을 본 지인이 찬물이 아닌 미지근한 물을 끼얹었다.

"언니, 근데 꼭 그렇게 영원히 안된다고 단언할 필요는 없다? 받아들여지는 시기가 올 수 있다고 봐. 마음이 열릴 수도 있는 거야. 괜찮아져서 다시 키우더라도 나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오히려 좋은 일이야. 언니가 행복으로 품을 수 있는 그런 강아지들이 아직 많이 있어." 사실은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 아니었을까.


'이 집의 모든 관심과 집중의 대상이 바뀌는 건 물론이고, 말도 못 하는 애가 어디 아프진 않을지 걱정만 늘 거야. 분명 돈이 많이 들겠지. 돌봐주는 사람 없이 여행은 자유롭지 못할 거야...' 등등 부정적인 결괏값만을 생각하던 내가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는 조금씩 변한 것도 같다. 유기동물을 입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앱이나 인스타 계정까지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또 하나, 가족들에 남아있는 상처나 아픔을 허심탄회까지는 아니더라도, 상태가 어떤지 점검하고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우리 중에서 제일 담담하고 조용하게 아파했을 아빠는 아직 그 슬픔이 가시지 않았는지 최근 나의 계속된 반려동물 타령에 더 이상 언급을 하지 말라며 피하시는 것을 보고 조금 충격을 받았다. 가족들의 시간과 감정이 내 타임라인과 동일하게 흘러간다고 착각했다는 걸 깨달은 지점이다.

앞날을 예측하긴 어렵지만 언젠가는 내가 집에 머물며 할 수 있는 일을 다시 구하게 되고 과감히 용기를 일으키는 날이 온다면, 새로운 식구를 맞이했다는 글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날, 우리 가족은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생과 사를 어렴풋이 떠올리고 인정하며 다시 만난 따스함을 마주하고 있지는 않을까?


이제는 기술이 발전해서 고양이의 수명을 30년까지 연장할 수도 있다는 뉴스의 헤드라인을 읽은 적이 있다.

전 세계의 애묘인들이 환영할 만한 소식이 아닌가? 물론 지금의 인간처럼 유병장수 100세 시대가 아니라 건강하게 연장되는 방법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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