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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Apr 29. 2024

고향 斷想

나의 살던 고향은... 어디인지 모르겠다.

그래, 고향이 어디인가? 사람들이 물으면 나는 항상 황해도 사람이라고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언제부터인가 나는 황해도 사람이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보고 나이가 얼마이길래 황해도에서 태어났냐고 묻곤 한다. 그러면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아니라고, 단지 원적이 황해도이고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면 서울 사람 아닌가요? 하고 다시 묻는다. 아니죠.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부산 사람인데, 아들이 서울에서 태어났다고 그 아들이 서울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냥 부산 사람이라고 하죠. 그러니 저도 황해도 사리원 사람인 것이 맞아요.

      

좁은 땅덩어리, 게다가 둘로 나뉘어서 국토가 더 작아진 나라에서 고향이 어디냐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지방색이 짙은 나라인데, 지금은 갈 수 없는 북쪽 지방 출신까지 고향을 강조하는 것은 정말이지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아무튼 그래도 나는 황해도 사람이었고, 아이들에게도 황해도 사람임을 틈만 나면 주지 시킨다. 아, 참. 그러고 보면 아내는 평안도 사람이다. 양쪽 모두 이른바 월남 가족이다. 

     

어렸을 적에 들었던 희미한 기억으로 할아버지는 대단한 부자였다고 말하면, 듣는 사람들 모두 그냥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다. 월남 가족치고 부자가 아닌 집안이 없었다는 거다. 북한에서는 특히 땅을 많이 소유한 지주 집안은 고향에서 살 수 없어서 남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그럴듯한 주장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나는 관심이 없다.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처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손에는 단돈 일 원짜리 하나 남겨진 것이 없으므로 내가 그 말을 믿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 아이들은 서울 소재 산부인과에서 이 년 간격으로 태어났다. 산부인과가 고향인 셈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황해도 사람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와 그 이전부터 황해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한다. 그런 것을 보면 나도 참 우습다. 대단한 뼈대가 있는 집안도 아닌 처지에 떠난 아버지의 고향을 들먹이고 있으니 말이다. 적어도 고향이라면, 불현듯 찾고 싶을 때는 언제라도 찾을 수 있는 곳이어야 고향이라는 단어가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로 보면 나에게 고향은 없다. 

    

고향은 흔히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곳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 말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의미가 퇴색되어 가는 단어가 바로 고향이 아닌가 싶다. 지금 나는 아이들에게 고향이 황해도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아들이 이제 백일을 갓 넘긴 손자에게 나중에 너의 고향은 황해도이다.라고, 이야기할지는 나도 모른다. 그때쯤이면 혹시 아들이 손자에게 그냥 우리는 서울이 고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손자에게 너의 할아버지까지는 고향이 황해도였고, 아빠부터는 고향이 서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에서와 같은 고향은 이제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 산골에도 사방이 꽃으로 둘러싸인 것이 아니라 회색빛 콘크리트로 둘러싸였을지도 모른다. 나만 고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산골 고향들도 점점 사라지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이가 점점 들어갈수록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원래부터 없던 고향, 사라져 가는 고향을 대신할 고향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그저 한낮 꿈으로만 남기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아이들이나 손자나 그 이후에라도 적당히 남들 물음에 대답할 거리가 없다면 그냥 우리 고향은 어디 어디야.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을 찾고 싶다. 황해도에서 월남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나에게 만들어 주지 못했던 우리 고향을 나의 대에서는 만들고 싶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여전히 꿈이다.

      

한동안 유행했던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처럼, 나의 꿈도 언젠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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