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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May 06. 2024

꺼져가는 창작의 불씨를 다시 살리자.

소설을 구상하다 보면 다양한 고민에 부딪힌다. 물론 이런 문제는 소설의 분량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 긴 長篇이든 짧은 掌篇이든 어차피 작가가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다. 나 역시 항상 그런 고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러다가 요행히 발밑에 작은 돌부리라도 걸려서 딛고 올라올 수 있게 되면 적당히 만족하는 소설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바닥이 단단한 돌부리인 줄 알았다가 발을 딛자마자 깊이 빠져버리는 돌부리라면 그 고민의 늪을 빠져나오는 데에는 한참의 시간이 걸린다.

소설 창작에 대한 기초가 없음이다. 맞아. 그런 것 같아.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을 의욕이 상실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서 꼭 소설을 써야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래. 기초가 없으면 지금부터라도 기초를 쌓으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시 글 쓰기에 도전해 본다. 아마 대부분 비전공자의 글쓰기 시작은 나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러면 나는 지금 어떻게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는지 정리해 보고 싶었다.

소설을 쓰려면 소재가 있어야 쓸 것이다. 물론 그 소재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소설의 소재로 가장 먼저 작가의 레이더에 잡히는 것은 과거의 경험과 추억이다. 자신의 기억은 물론이고 가족이나 친구, 사돈의 팔촌까지 자기 주위에서 주워들을 수 있는 모든 경험과 사연과 추억들이 모두 소설의 소재가 될 수 있다. 너무 적나라하게 소재의 출처에 대해서 까발리지만 않는다면 아무도 내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는 불쾌감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자기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 줘서 고맙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그렇게 소설의 소재 발굴을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소설가 소설이 탄생한다. 장점은 소재의 발굴이 쉽다는 것이고, 단점은 소재가 제한적임과 동시에 소재가 고갈되면 스스로 새로운 소설을 쓸 능력도 고갈된다는 점이다. 마치 보험영업에 뛰어든 영업사원이 처음에는 영업이 쉽다는 이유로 연고 영업에만 매달리다 보면, 새로운 영업 대상을 찾아내는 능력을 절대로 키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많은 영업직 도전자가 이 단계에서 영업직을 포기한다. 어설픈 작가도 이 단계에서는 창작을 포기한다. 나에게는 분명히 작가적 능력이 없는 거야.라는 자위 섞인 탄식만 남기고 돌아선다.

다음으로 소설의 소재로 불려 나오는 것은 상상력이다. 시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간에 작가가 동원한 소재는 현실적이거나 허구적이거나 뭐 그런 커다란 기준에서 나뉠 수 있다. 경험이나 추억이나 사연이 현실성의 띠고 있다면, 상상은 허구적이다. 그렇지만 허구적인 세상도 사실은 현실적인 세상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직접 그 세상을 경험한 사람을 찾는 것이 전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작가는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라고 말한다.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메모지와 필기도구를 가까이 두라고 권한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머리맡에 종이와 필기구를 놓고 자라고 한다. 그래야 잠 속에서 떠오른 상상까지도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길 수 있으며, 그런 기록이 나중에 가면 훌륭한 소재가 된다고 한다. 물론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 말에 따라서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실제 메모를 해 본 사람은 금방 알 수 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글로 옮기다 보면 왜 그렇게 메모가 두서가 없어지는지 모른다. 분명히 멋진 글감이라고 생각해서 메모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읽어보면 도무지 왜 이런 이야기를 메모했는지 자신이 한심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다른 방법으로는 시대적이나 사회적으로 요란했던 사건이나 현상, 또는 풍조 등에서 착안한 소재에 대해 다양한 조사와 연구를 함으로써 小說化하는 방법이다. 역사소설도 그렇고 다양한 대하소설들이 그렇다. 단편으로는 풍자 소설도 이런 부류에 속한다. 이런 방법으로 소설을 구상하는 일은 나 같은 초보자에게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작업이다. 아마 필력이 어느 정도 높은 경지에 오르고 나야만 그나마 마음이라도 먹어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법은 일단 제쳐놓고 있다.

소설의 소재가 떠오르면 구체적인 줄거리를 만들어 가야 한다. 플롯이니 뭐니 하는 용어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독자로 하여 소설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몰입감을 주는 구성을 짜는 일이다. 간혹 구성을 짜다 보면, 기승전결의 구조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소설도 있다. 하긴 요즘에는 소설에 따라서 연작 형태로 줄거리를 전개하는 경우, 결말에 목을 맬 필요도 없다. 그러다 보면 기존에 알고 있던 소설의 기본적 구조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설 창작의 이론적 배경을 무시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잠재적 독자에게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어떤 형식이라도 용납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일 뿐이다.

요즘 내가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이제 명백해졌다. 소재의 발굴 단계에서부터 내가 게을렀기 때문이었다. 작년과 재작년에 처음 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는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첫 번째 방법으로 소재를 긁어모았고 다음에는 약간의 상상력도 동원해 보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소설의 소재로 이용할 만한 충분한 경험도 없었고, 주워들은 이야기도 많지 않았고, 독서든 뭐든 상상력의 범위를 넓힐 노력도 하지 않았다. 물론 주위에는 누차 말하곤 했다. 다양한 경험, 특히 독서의 경우에는 글을 잘 쓰기 위한 목적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정반대의 역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글을 이렇게 잘만 쓰는데, 나는 왜 잘 쓰지 못할까? 하는 자존감 떨어지는 생각에나 빠진다든지, 아니면 어설픈 모방의 길로 들어서면서 창작 자생력을 잃어간다든지 하는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많이 읽어서 어설프게나마 아는 것이 많다고 자만에 빠져서 잘난 척만 하는 부작용은 덤으로 따라오게 된다. 그래서 절대로 쓰기 공부를 위한 독서는 권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소설을 읽는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기억이나 상상은 제한적이지 않다고 믿는다. 단지 찾아내지 못할 뿐이다. 나의 뇌리 어디엔가 존재하는 기억이나 상상력은 단지 유사한 경우를 접하지 못해서 발현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전제라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책을 읽는 행위가 내가 미처 찾아내지 못했던 소설 소재를 연상시킬 수 있는 계기로서의 독서라면,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작 그런 이야기를 접하다 보면 평소에 떠오르지 않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를 수 있다. 이런 논리는 소재의 발굴에 있어서 확실히 경험해 볼 가치가 있는 이론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잠시 손을 놓았던 책 읽기를 계속하려고 한다. 나만의 이론이 성과를 발휘하기를 기원하면서, 그리고 잠시 깜박거리며 꺼져가던 내 창작의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오르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아울러서 나와 비슷한 고민으로 잠시 글이 써지지 않는 작가님이 있다면, 그분에게도 창작의 불꽃이 다시 활활 타오르기를 기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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