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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May 28. 2024

8인 테마 소설집 <1995>를 읽고

제목을 <1995>라고 지은 것을 보면 이 책에 수록된 8편의 작품이 어느 시대를 배경으로 했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어느 해나 마찬가지로 1995년에도 많은 사건이 있었고, 8인의 작가는 각자의 기억을 간직하고 그 시기를 보냈다. 물론 오롯이 시대적인 교차점만이 작가들을 이어주고 있지만, 실상은 다양한 인물을 통해서 작품을 읽는 독자들이 한 번쯤은 그 시대를 회상해 주기를 바라는 공통점이 있는지도 모른다. 8편을 모두 소개하는 것은 지면상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또한 책을 소개하는 글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중 몇 작품만 간단히 소개하겠다. 나머지 작품은 관심 있는 독자분들이 차후에 접해 보시기를 권해드린다.      

<모두의 그날>을 쓴 김형주 작가는 2008년 작가세계 신인상 수상과 함께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5.18 시기를 겪은 인물 중 그 후 시간이 흘러도 마치 그날에서 그대로 얼어붙은 듯 멈춘 시간 속을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택시를 운전하는 주인공도 마찬가지이며, 알게 모르게 이웃으로 지냈던 윗집 노파의 작은 아들도 마찬가지다. 기억할 부분은 그런 인물들 대부분이 이십 대에 그 시기를 보냈다는 점이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 나이라면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시작하기도 전의 나이였고, 그만큼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인생들이다. 그들은 오롯이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도 시원찮을 판국에 비자발적 타의에 의해 역사의 수레바퀴 한가운데로 휩쓸렸으며, 그들을 그곳으로 밀어 넣은 인간들은 그들의 인생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그들 역시 자기들만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모순이 어디에 있는가? 매일 악몽에 시달리던 주인공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시절의 이야기라면 이제는 그만 듣고 싶을 뿐이다. 자신들을 그런 세상에 밀어 넣은 사람들이 재판받고 죗값을 치르는 상황에 놓인다 해도, 그들의 지난 인생을 되돌릴 수는 없다. “죽어버려 대머리 새끼! 그 새끼 꼬붕들도 다 한꺼번에 뒈져 버리라고! 인간도 아닌 새끼들! 내 인생 책임져, 개새끼들아! 니들이 뭔데, 니들이 신이야? 광주가 폭동이야? 돈 없고 빽 없으면 깡패만도 못한 거냐? 이 찢어 죽일 놈들아!” (32쪽) 주인공의 택시를 타고 럭키 웨딩홀을 찾던 사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가 주인공의 가슴을 파고든다. 운전하다가 손님들 입을 통해 그날에 대해 듣는 날은 공치는 날이었을 정도로 주인공에게는 금기시된 이야기들이 1995년 12월 3일 이후로는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주인공은 역시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다시 느낀다.

     

<베이비 오일>의 작가 양진채는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나스카 라인>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여자 기숙학교 방화 사건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 가슴속에 물을 품고 살아가는 한 여성의 모습을 통하여 공포와 절망에 가까운 트라우마를 그리고 있다. “열여섯 이후로 지금까지 오랫동안 떠돌기도 했고, 죽도록 일도 했고, 사랑도 했죠. 그런데도 그런 일들이 내겐 도통 기억나지 않아요. 내가 기억하는 건 모두 불이었죠. 떠돌 때도, 일에 지쳐 잠들었을 때도, 사랑을 나눌 때도 불씨가 불쑥불쑥 들어왔죠. 처음엔 샤워기를 틀어놓은 채 온몸으로 물을 맞으며 열이 식기를 기다리기도 했고, 동네를 몇 바퀴 뛰어다녀 보기도 했고, 냉장고 속에 얼굴을 들이밀기도 했고, 기도를 해보기도 했어요. 어떤 것을 해보아도 소용없었어요” (57쪽) 불을 보기 위해 불을 지르는, 그래야 가슴속의 불씨가 잦아들고 하는, 그러면서 매일 불에 타 죽는 상상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아마도 기숙학원 화재 사건 이후에 주인공이 떠안게 된 친구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화재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묻어 버리려는 사회 정의의 부존재에 대한 동조할 수 없다는 마음속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숙학원 방화 사건 주동자 중 한 명으로서, 방안에 쌓아 놓은 이불과 휴지에 불이 잘 붙도록 베이비 오일을 뿌린, 그래서 발생한 유독 가스가 친구를 비롯한 여러 명의 희생자를 내게 한 사람이 바로 주인공이었으므로. 주인공도 결국 자기 가슴속 불씨의 온도가 인체 자연발화가 가능한 2,000도 이상으로 타오르기만을 기다리며, 영원히 기억의 한순간 속에 붙잡힌 장면을 끝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철거 후>의 작가 이경희는 실천문학 신인상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건물 철거 업체에 근무하는 역사학도 출신의 주인공과 고등학교 중퇴자인 사장, 그리고 사장의 친구인 남 부장의 대화 속에서 일반 소시민의 역사의식에 대한 극명한 차이를 그리고 있다. 사건은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와 맞물려 발생한다. 


조선총독부 건물 폭탄 투척 사건이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상해 전승 축하 기념식장 폭탄 투척 사건 등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라고는 전혀 없고 그저 부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사장과 철거는 하더라도 역사적 유물로서의 가치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주인공 사이에서 팽팽한 긴장이 감돌지만, 퇴사를 앞두고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당당한 주장을 펴는 주인공의 승리로 끝난다. 남 부장의 말처럼, 한여름 매미도 죽기 전에 더 크게 울 듯이 퇴사 직전의 주인공도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펼친 것이다. 철거에 신중해야 한다는 주인공의 말에 사장은 다짜고짜 친일파 운운하면서 주인공을 밀어붙이는 것으로 잠시 승기를 빼앗아 가려고 했지만, 그것도 실패로 돌아간다. 이것저것 불만이 많은 사장은 결국 철거 직전 광복 50주년 경축 기념식 행사장에서 직접 크레인을 운전해서 건물 위 돔을 해체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역사에 무지한 소시민의 역사의식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심을 겨우 보존하는 모습으로 소설은 끝난다.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테마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이라서 그런지, 주인공들은 기억 속의 한 시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평범한 시민들에게 역사적 사실은 어쩌면 오늘 벌어서 오늘 먹고사는 문제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작가가 그런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고자 글을 쓴 것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그저 읽는 사람이 느껴야 할 문제다. 

      

이외에도 오래전에 사라진 주유소를 이정표로 고집하는 사람들 속에서 집합의 원소 중 하나가 되기를 거부했던 주인공의 기억을 불러오는 정태언 작가의 <집합주유소>, 1995년 태풍 페이 때 벌어진 갯바위 실족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남자의 이야기 속에서 집념의 허무를 그린 조현 작가의 <화성의 물고기를 낚는 경쾌한 낚시법>, ‘윈도 95’ 출시에 빗대어 아무 거리낌 없이 성장 가도를 질주했던 시대를 그린 진보경 작가의 <구이의 시대>, 단추라는 인물을 통해 세 이모의 기묘한 이야기를 그린 채현선 작가의 <단추를 세다>, 유신 이전의 군부독재 시대부터 문민 시대를 함께 지나온 인권변호사인 ‘나’와 직업 군인 친구를 통해 1995년까지의 시대상을 묻고 있는 허택 작가의 <1995년의 결>이 실려 있다. 1995년 ㈜도서출판 강에서 출간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박영 작가의 <이름 없는 사람들>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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