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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Jun 29. 2024

휴일의 전화

요즘 주혁은 아예 전화를 안 받는다. 나에게 무슨 기분이 상한 일이라도 있었나? 나는 오늘도 맥없이 울리는 전화 신호음에 지쳐 그냥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언제부터 그랬을까? 아마 몇 년은 된 것 같은데,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내가 휴일에만 전화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친구 사이에 서로 바쁜 평일에 전화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모르겠다. 

    

주혁이나 선호나 형운이는 모두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했던 친구다. 물론 커가면서 함께 살던 동네에서 각자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잠시 헤어졌던 시간은 있었지만, 나중에 다시 만나 지금까지도 우정을 나누고 있는 가까운 친구들이다.

      

선호냐. 나다. 잘 지내지?

어. 그래.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은 무슨. 친구가 뭐 꼭 일이 있어야 전화하냐? 그냥 했지.

그래? 그러면 조금 있다가 나중에 통화할래? 지금 뭘 좀 하던 일이 있어서 말이야.

아, 그렇구나. 그래. 나중에 통화하자.

     

선호는 전화를 받기는 하는데, 어째 나랑 통화하는 것을 별로 반기지 않는 목소리다. 얼른 끊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선호에게도 내가 뭘 잘못한 일이 있었던가? 그런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 아무튼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 이 자식은 한 이야기 또 하고 그러네. 

그래? 내가 그랬어? 하하하.

그래. 너 요즘 술만 마시면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그러는 거 알아?

미안, 미안하다. 난 또 안 한 이야기인 줄 알았지.  

    

간혹 술자리에서도 내가 무슨 이야기라도 하면 언제나 면박을 준다. 친구끼리 그냥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인데도 꼭 짚고 넘어가야 속이 시원한 모양이었다. 나야 뭐 그냥 친구들이 그러니까 내가 잘못한 것 같기도 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넘기지만, 아무래도 나 혼자만 친구들의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온 것만 같은 생각이 점점 깊어진다. 

    

요즘 형운이는 나에게 자주 짜증을 낸다.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 처음에는 말도 웃으면서 했는데, 날이 갈수록 짜증이 형운의 얼굴에서 내 얼굴까지 번져 나온다. 아무래도 형운이가 요즘 안 좋은 일이 있는 것만 같다. 무슨 일인지 알면 내가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냥 안타깝다는 생각뿐이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관악산에 올라간 적이 있었다. 등산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고, 그냥 동네 뒷산 산길 산책 정도로 생각하고 올라갔던 것이 문제였다. 산 이름 중에 ‘岳’ 자가 들어가는 산은 바위가 많고 험한 산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관악산도 그 이름값을 하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가파르고 험한 산이었던 것 같은 기억이 난다. 오죽 험했으면 ‘岳’ 자 대신 ‘惡’ 자를 쓰는 산이라고 했을까. 아무튼 무슨 용기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수직으로 깎아지른 돌산을 닳아빠진 운동화에 의지해서 올랐다. 도중에 미끄러질 뻔한 내 손을 잡아준 친구가 바로 주혁이었다. 

     

이십여 년 만에 우연히 길에서 선호를 만났다. 우리가 살던 동네에서 각자 흩어져 이사하고 난 후 처음이었다. 기억으로는 주혁이 먼저 동네를 떠났고, 그다음에 선호와 형운의 순서로 떠났다. 내가 마지막까지 동네를 지키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할 때쯤 그 골목을 떠났다. 그러니 고등학생 시절 헤어졌다가 사회인이 되고, 결혼까지 한 후에 만난 셈이다. 선호의 얼굴은 거짓말처럼 그 시절의 모습과 똑같았다. 나는 아마도 조금 삭은 얼굴이었을 것이다. 술을 너무 마셔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선호 덕분에 주혁과 형운도 함께 만났다. 만난 김에 앞으로는 정기적으로 보자는 이야기도 했고, 오래간만에 술도 많이 마셨다.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잠을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회사에서 퇴근 시간에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더군다나 그날은 이십 년 만에 친구들을 만나서 술을 마시고 오겠다고 미리 이야기했음에도 아내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친구 만나는 것은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허구한 날 그렇게 술을 마시고 들어와야 하겠어? 아, 늦게 들어온 것은 미안한데, 남자들이 친구 만나면 다 그런 거지. 그걸 꼭 그렇게 뭐라고 해야 하는 거야? 미안해. 이제 다신 늦지 않을 테니까. 아니 당신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기니 뭐니 하니까 하는 말이잖아. 몸이 그 지경이면 이제는 술을 좀 줄일 줄도 알아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다가 집도 못 찾아오면 어쩌려고 그러는데? 남들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술 마시는 횟수가 줄어든다는데, 내일 모래면 나이 오십이 되어가는데도 술을 줄이지 못하는 나에게, 아내 참을 만큼 참았던 울화를 기어이 터드리고야 말았다. 

     

나는 아내가 내가 걱정되어 그런 말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아내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아직은 내가 술 때문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길 정도의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아내의 말을 그때그때 적당히 넘겨오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 환갑이 다 되어가니 그나마 남아 있던 주혁이와 선호, 형운이 같은 술친구까지도 이렇게 전화를 받지 않으면서 나를 멀리하는 것이 아닌가? 그저 서운한 마음만 순간순간 가슴속에서 솟아올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친구들에게 서운하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자존감이 떨어지는 일이었다. 그냥 친구들도 무슨 사정이 있기에 나를 점점 멀리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는 아내가 십수 년 전에 했던 말이 계속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당신은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떻게 걱정이 안 되겠어? 가뜩이나 요즘 기억도 가물가물해 가는 처지에 어디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길에서 쓰러져 있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당신이 지금 그렇게 돌아다니니까 뭐 멀쩡한 사람인 줄 아는가 본데, 당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당신, 이제부터는 치매가 시작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알아? 의사도 그러잖아. 점점 기억이 사라질 거라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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