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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May 09. 2024

위문편지

“요즘은 위문편지도 봉사점수를 받기 위해 쓰는가 보네?” 휴대전화를 보며 혼자 중얼거리는 그의 말을 옆에서 아내가 거들었다. “그게 무슨 위문편지야? 우리 때는 안 그랬잖아? 정말 순수하게 ‘위문’한다는 마음으로 썼는데.” “그러게. 위문편지 받고 답장하는 재미도 낭만이었는데. 그렇지 않아?” 그는 창밖을 내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군 생활을 하던 시기에 대부분 학생은 종종 학교에서 군인에게 위문편지를 보냈다. 삐뚤삐뚤한 초등학생의 편지부터 졸업을 앞둔 고등학생의 편지까지 다양한 위문편지가 학교별로 결연을 맺은 전국의 모든 군부대 군인에게 배달되었다. 물론 학교 차원에서 단체로 보내는 것이기는 해도 지금처럼 봉사점수를 받기 위해 쓴 것은 아닌 만큼, 나름 순수하게 ‘위문’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냈다. “존경하는 국군 장병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위문편지는 많은 군인에게 즐거움을 주었는데, 그런 위문편지 중에서 특히 여고생이 쓴 편지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군인 아저씨라고 해봐야 실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입대한 경우라면 기껏 두세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여학생의 편지였기 때문이다. 그런 위문편지로 이어진 인연은 잘만 하면 나중에 제대한 후까지 계속되기를 기대해 볼 수도 있었다.

      

그가 복무하던 부대와 자매결연을 맺은 학교는 서울에 있는 한 여자고등학교였다. 군인들은 해마다 부대 주변을 돌며 싸릿대를 꺾어 빗자루를 만들어서 트럭에 한가득 실어 학교로 보냈고, 그 학교 고적대 여학생들은 답례로 일 년에 한 번씩 위문편지를 잔뜩 갖고 부대로 위문 공연을 왔다. 전방에서 민간인을 전혀 볼 수 없던 군인에게 그날만큼은 말 그대로 ‘위문’이 되는 날이었다. 날씬한 여고생들이 짧은 치마의 멋진 고적대 의상을 입고 연병장에 정렬해서 악기를 연주하며 공연하는 모습을 보면 혈기가 왕성한 군인 누구나 눈이 돌아가기 마련이었고, 공연이 끝난 후 내무반에서 위문편지를 나누어 가질 때에는 글씨가 가지런하거나 이름이 예쁜 여학생의 편지부터 선임병 순으로 차례가 돌아갔다. 물론 그렇게 고른 편지 중에 어쩌다가 정말 표리부동하게 무성의한 내용이 뒤통수를 치는 편지도 있었지만, 그래도 편지를 읽으면서 풋풋하고 상큼한 여학생의 모습을 상상하는 재미도 나름 좋았다. 그리고 간혹 정성스럽게 답장하면 여학생이 계속 편지를 보내주는 일도 있었고, 어쩌다가 여학생 사진이라도 한 장 받을 때는 거의 신줏단지 모시듯 관물대 깊은 곳에 숨겨 두고 틈만 나면 꺼내 보곤 했다. 

    

입대한 해의 연말에 그가 받은 여고생의 위문편지는 그의 부대가 전방의 철책을 경계하는 지역으로 투입될 때까지도 왕래가 계속되었다.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는 경계근무를 서는 것이 일과인지라 낮에 편지를 읽어 볼 틈도 답장을 쓸 틈도 없었고, 그나마 경계근무 시 초소에서나 희미한 달빛 아래 편지를 읽고 답장도 쓸 수 있었다. “지금 편지, 달빛 아래에서 쓰는 거야.” 그는 그 말 한마디에도 낭만을 실어 보냈다. 초소 지붕에 얹은 짚단 위에 편지지를 놓고 편지를 쓰다 보면 편지지 군데군데 볼펜에 눌려서 구멍이 나곤 했는데 그것조차도 여학생에게는 감동이었고, 그런 볼펜 자국 하나만으로도 한창 감수성 짙은 여학생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군인 아저씨’가 ‘오빠’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제대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 덕분에 힘든 군대 생활을 즐겁게 마칠 수 있었거든. 이제 편지도 끝이겠지?” 제대와 동시에 여학생과의 인연이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아쉬움에, 그는 미련과 안타까움을 꼭꼭 접어서 마지막 편지에 넣어 보냈다. 

     

그렇게 달빛 아래의 편지 읽기와 답장 쓰기는 끝났고 더 이상 둘 사이에 편지 왕래가 없었는데, 뜻밖에 그가 제대 후 끊어진 듯 보였던 인연을 다시 이어준 것은 벚꽃이 만개한 어느 날 그에게 배달된 여학생이 보낸 대학 학보 한 통이었다.

      

“당신 또 내가 보낸 위문편지 생각했지?” 옆에서 아내가 웃으며 물었다. “응, 달만 보면 그 생각이 나. 지금 생각해도 그때는 경계근무를 서기 위해서 초소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당신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려고 들어갔던 것 같아.” 그의 말에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 아저씨가 정말 정신이 나갔었나 봐. 철책을 지키는 군인이 뭐? 경계근무는 안 서고 편지만 썼다고? 두 눈 부릅뜨고 경계근무를 서도 시원찮을 판에 말이야. 이런 군인 아저씨를 믿고 내가 밤에 잠을 편하게 잤다니 정말 나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니까.” “그러게.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당신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거 알아? 그렇게 답장하라고 편지 보낸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잖아.” 그는 아내와 함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웃었다. 

    

창밖 하늘에는 초소 위에서 그의 편지지를 비추었던 그날처럼, 둥글고 밝은 달이 두 사람을 들여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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