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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Apr 20. 2024

엘리베이터 - 그 후에

뭐든지 처음이 힘들 뿐이다.

출근 시간에 같은 동 주민들로 비좁던 엘리베이터가 웬일인지 오늘은 텅 빈 채로 우리를 맞았다. 물론 우리라고 하는 생각은 나만의 상상이었고, 그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매일 출근길 엘리베이터 앞에서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문이 열리기 전까지의 그 짧은 시간만이 하루 중 그녀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었고, 그나마 불과 일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으므로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 한 달간 출근할 때마다 현관 안에서 옆집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가 현관문 소리나 신발 소리가 들리면, 그때 밖으로 나갔다. 물론 내가 나감과 동시에 옆집에서도 그녀가 나와서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가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고, 나는 따라가서 그녀와 조금 간격을 두고 서 있곤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 인사는커녕 얼굴조차 정면으로 본 적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그렇게 옆집에 살면서 출근길마다 마주친다면 가벼운 인사 정도는 하는 것이 보통 주민 사이일 텐데,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어찌 보면 남자인 나의 소심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남자가 먼저 처음 보는 여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경계하라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더욱 서먹서먹했다. 나란히 서서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곁눈질조차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은 고요한 적막 그 자체였다.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단둘이 있는 시간에 말을 건넨다는 것이 생각보다는 용기를 요구한다는 사실만 절실히 느끼면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물론 말로는 쉽다. 그냥 안녕하세요? 라든지 뭐 비슷한 말을 건네면 되는데, 그런 말을 건네기에는 이미 시간도 늦었다. 그런 말은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서 얼굴을 마주쳤을 때 하는 인사가 아니던가? 그렇다고 공연히 실없는 말로 시선을 끌 수도 없었다. 그녀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살짝 눈길을 돌려서 그녀를 쳐다보는 것도 나에게는 힘든 일이다. 그렇게 눈길을 주었다가 만일 그 찰나에 그녀가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순간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그냥 앞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주민들이 함께 타고 있던 날에는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옆에 서 있고 싶어서 순식간에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원망스럽기도 했는데, 오늘은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엘리베이터가 왜 이렇게 늦기 내려가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겨우 고개를 들어 출입문 위의 층 표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오래 내려왔는데도 이제 겨우 두 층을 내려왔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슴이 점점 답답해 옴을 느꼈다.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로 죄어 오는 갑갑함을 앞으로 십오 층을 더 내려가야 한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손에 쥔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며 구두코를 내려보았다. 그렇게 고개를 숙이니, 내가 그녀 쪽으로 고개는 움직이지 않은 채 시선을 돌려도 그녀가 알아채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용기를 내어 눈길만 돌려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늘거리는 치마 아래 단정한 검은색 구두 사이로 날씬한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훔쳐보는 것만 같아서 마음은 조바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자기의 신체를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기라도 한다면 무슨 파렴치범 취급을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내 눈은 그녀의 다리에서 떠날 수 없었다. 적당히 날씬한 종아리 아래 손목에 쏙 들어올 정도의 가는 발목과 구두 위로 드러나는 매끄러운 발등이 내 눈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가슴은 더욱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얼굴이 화끈거릴지 봐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이대로 그냥 엘리베이터가 얼른 주차장에 도착해서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다행스럽게 그녀는 내가 자기의 다리를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자세에서는 그녀가 이상스럽게 느껴서 내 쪽을 바라본다고 해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는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긴 하다. 고개를 숙인 자세가 어색해 보이지 않도록 하고, 나중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기 위해서 손 안의 휴대전화 화면을 켰다. 아주 자연스럽게 휴대전화를 보는 자세가 되었다. 이 정도면 그녀도 내 자세가 어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정적의 시간이 끝나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나는 그래도 남자랍시고 고개를 들어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가 먼저 내리기를 기다려 주었다. 아마도 제법 매너가 있는 행동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를 바라보는 내 얼굴을 보더니 그때까지도 주위에 다른 주민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남자가 그렇게 숫기가 없어요? 한 달을 기다려 봐야 말 한마디 붙이지 못하고, 그저 몰래 다리나 훔쳐보고 말이에요. 그러지 마시고 내일부터는 아침에 보면 그냥 인사하고 지내요. 저도 오늘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 숨이 막히기 일보 직전이었다고요. 그럼,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엘리베이터 앞을 떠나서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주차된 차들 사이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러 구독자님들께서 이 글 전편의 결미에 대해서 말들이 많으셨다. 열어도 너무 열었다느니 둘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느니, 아무튼 속편을 써 달라고 하는 댓글이 많았고, 결정적으로 '바람'작가님께 약속한 바도 있어서 급하게 글을 만들어 보았다. 이번 글에서의 화자는 '나'로 정했다. 그러는 편이 심리상태를 그리기에 적절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속속편은 없다.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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