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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Apr 17. 2024

어느 봄날의 기억

길가에 늘어선 벚나무가 꽃잎을 다 떨구고 초록 잎으로 옷을 갈아입은 것을 보니 어느덧 오는 둥 마는 둥 했던 봄도 제 갈 길을 찾은 모양이었다. 벚꽃은 왜 그렇게도 빨리 떨어지는지 모른다. 벚나무는 다음이라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활짝 핀 꽃잎을 보고 내일은 나가서 사진이라도 찍어봐야지 하고 생각했다가는 어느새 다 떨어진 꽃잎만 신발로 쓸며 걷게 될 뿐이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냥 창을 통해서 내다본 경치로만 만족하기로 했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식어버린 커피잔만이 그를 올려 보고 있었다. 마치 얼굴 가득 눈만 있는 머리를 위로 쳐들고 있는 외계인 같은 모습이었다. 그것도 아주 퀭한 눈이었다.

      

“무슨 생각 중이야?” 어느새 다가왔는지 그의 눈앞에서 영은이 생글거리며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지금 오는 길이야?” “좀 전에 왔지. 내가 오는 줄도 모르고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고 있었어?” 영은이 그의 앞에 앉으며 말했다. 영은은 항상 그랬다. 어떨 때는 정말 아무 기척도 없이 다가오는 바람에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니면 그가 둔한 건지.

     

영은과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어중간한 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한 이래로 생각해 보니 몇 년은 지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사귄다고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귄다는 것이 뭐 별다른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시간이 날 때 함께 있기만 해도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는 온통 “둘이 사귀는 거야?”라는 말뿐이니 말이다. 그렇게 보면 떠밀려서 사귀는 것 같기도 하다. 언젠가 영은이 물었다. 우리 사이는 어떤 사이일까? 그 흔한 연인 사이일까? 아니면 그저 그런 남사친 여사친 사이일까? 그는 영은의 물음에 금방 대답할 수 없었다.

      

영은을 알게 된 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다. 대학에 입학해서 한창 물이 오르던 신입생 시절, 많은 여학생 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영은의 주위에는 항상 남학생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한다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영은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면 누구나 속물적인 표현으로 하늘의 천사가 잠시 내려온 것 같은 그런 인상을 받았다. 물론 그 역시 뭇 남학생처럼 영은에게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영은에게 다가가지 못했던 소심함을 변호할 요량으로 연애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만 주위에 흘리고 다녔다. 그러니 영은이 그런 그에게 관심을 두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무것도 아니긴, 뭔 생각을 했는데 그래?” 그냥 얼버무리던 그에게 영은이 짓궂게 달려들었다. “그냥 옛날 일 생각했지.” “그래? 옛날 일? 뭐?” 영은은 언제나 그랬다.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듣기 전에는 끈질기게 묻곤 하는 습관은 어디 가지를 않았다. 결국은 영은과 만나서 함께 지내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영은이 자기처럼 별 매력도 없는 남자와 친하게 지내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가야지만 질문 세례가 끝났다. 어떨 때는 조금 치사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영은과 함께 다닐 때마다 늘 그들 주위를 맴돌던 수많은 남자의 눈길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수할 만한 비굴함이었다.

      

간혹 환상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남자가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함께 하고 싶어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라면, 사귀었을 때 뭔가 있어도 있을 것이라는 환상, 바로 그런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아름다운 여자는 마음씨도 고울 것 같고, 아는 것도 많을 것 같고, 친절하고, 이지적이고, 아무튼 좋은 단어라면 모두 해당할 것만 같은 느낌이 있는 법이다. 물론 영은을 처음 보는 남자들은 모두 그런 느낌을 받을 것은 분명했다. 그 정도로 영은의 외모는 뛰어났다.

     

영은과 만나면서 이상하게도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나이가 결혼 적령기가 아니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물론 비혼주의는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이미 충분히 나이를 먹을 대로 먹었으므로 내일 당장 결혼한다고 해도 이상한 것 없는 상황이지만, 웬일인지 그나 영은 모두 결혼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는 지금까지 그런 상황이 별로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요새 와서는 가끔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그만의 생각일 것이다. 영은은 여전히 결혼에 대해서는 일절 말이 없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왜 결혼하지 않는 거지? 내가 청혼을 안 했던가?”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영은에게 물었고, 영은은 생글거리면서 말했다. “안 하긴? 우리 이미 결혼했잖아.” 그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영은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결혼했다고?” “그래. 우리는 진즉에 결혼했어. 예쁜 딸도 있고. 기억 안 나?” 영은은 여전히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렇구나.” 매번 듣는 그의 말이지만, 오늘은 유독 쓸쓸해 보였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영은은 피곤하다고 하는 그를 데리고 침대로 가서 누이고는, 그가 잠이 드는 것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원래 가장 가까운 최근의 기억부터 잃어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대부분의 기억은 잃어버리고, 가장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만 간직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는 현상이지요. 아마 지금쯤이면 이미 지혜 씨도 잘 알아보지 못하시지 않나요?” “네, 이제는 저만 보면 영은아! 하면서, 어머니 이름을 부르세요.” 지난번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김 박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지혜는 쓸쓸하게 병원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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