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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Oct 22. 2024

다시 처음으로

도대체 무엇이 꿈인지?

자기가 처한 상황이 현실이 아닌 꿈속의 상황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종종 믿기 힘든 상황에 대하여 꿈결 같다느니 하는 표현을 동원한다. 물론 이는 믿기 어렵다는 뜻과 동시에 상반되는 뜻으로써의 상상이나 바람을 뜻하기도 한다. 현실에서 이루기 힘든 일을 이루는 환상이라든지 하는 사례가 이에 속한다. 나도 종종 겪는 현상이다. 


    

내가 지수에게 마음이 끌린 이유는 단순히 외모에 끌려서가 아니다. 지수가 다른 여자에 비해 눈에 띄게 예쁜 것은 사실이지만, 지수에게는 외모 이상으로 나의 마음을 휘어잡는 다른 그 무엇이 있었다. 우리는 대학 졸업을 즈음하여 도서관에서 만났다.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은 곧 사회생활이라는 생존경쟁의 장으로 뛰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재학 중 군에 다녀왔기 때문에 지수보다는 나이가 많았지만, 사회 초년생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지수와는 말하지 않아도 애틋한 동료 의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짧은 대학 시절의 낭만 아닌 낭만을 도서관에서 보내고, 우리는 곧바로 졸업해서 각자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직장 생활 중에도 지수와 나 사이에 흐르던 우정인지 사랑인지 모를 야릇한 기분에 이상이 생긴 것은 오롯이 지수 때문이었다. 사실 남자씩이나 되어서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우리의 관계에 금이 가게 된 데에 명백하게 지수의 미모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남자들이 아름다운 여성에게 끌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생존 본능의 발현이다. 아름다운 여자를 차지하고 외모상으로 우월한 종족을 퍼트리고자 하는 것은 본능적 충동이다. 하지만 지수가 나를 진정한 남자친구라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접근하는 뭇 남자들에게 나의 존재에 대해 확실하게 밝히면서 그들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했어야 했다. 그런데 지수는 그렇지 않았다. 심지어 나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도 심심찮게 그런 남자 이야기를 화제로 올렸다. 지수는 여왕벌 그 자체였다. 중요한 것은 지수로부터 그런 남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그 남자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었고, 객관적이나 사회적인 시각에서 나보다 우월한 조건의 남자가 등장할 때마다 나의 자존감은 비참할 정도로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지수와의 관계도 오래 유지되기 힘들 것은 분명했다. 지수는 항상 의기소침한 나에게 자기는 전혀 그런 남자에게 관심조차 없다고, 자기에게는 나밖에 없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나는 그 말이 왠지 나에게 실망했다거나 아쉬운 것이 많다는 말처럼 들렸다. 자격지심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지만, 솔직히 지수도 애써 그런 표정을 감추려 하지는 않아 보였다. 이 정도쯤 되면 내가 적어도 남자라면, 그리고 지수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흔한 드라마 속 이별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 준다느니 하면서 지수를 그런 남자에게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소심한 나는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 그저 이 모든 상황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을 유일한 위안으로 삼고 지수와의 관계를 아슬아슬하게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꿈속에서 헤매다가 나중에 꿈에서 깨어났을 때 지금 꿈속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수 주위의 남자들에 대한 우려는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지수는 그들에게 전혀 관심조차 없었다는 말이 현실로 밝혀지면서, 지수와 나의 앞길에 펼쳐질 행복한 결혼생활을 상상하고 싶었다. 



               

결국 그런 나의 상상은 현실로 이루어졌고 지수는 나의 아내가 되었다. 그래, 이것이 바로 현실이지. 공연한 걱정을 했던 거야. 지금까지 내가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일들은 모두 꿈이 맞았던 거야. 나는 앞으로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지수와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만 상상하기로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우리도 노년의 길에 접어들었다. 아이들은 모두 장성해서 각자 가정을 이루어 우리 곁을 떠났고, 우리는 다시 처음처럼 둘만 남았다. 예전에는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상상이나 하고 그랬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나에 대한 너의 사랑이 확고했었는데 말이야. 내 말에 지수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기에 말이야. 내가 그렇게 아니라고 해도 나를 의심하더니, 지금 생각해 보니 기분이 어때? 어떻긴 뭘, 그냥 그렇게 자격지심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를 건져 줘서 너에게 지금까지도 항상 고마워하고 있잖아. 나는 살아오면서 주기적으로 지수에게 했던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 알았으니 됐어. 지수가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았다.



                

아니, 왜 말이 없어?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내가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야지 무슨 남자가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 그래서 나보고 그런 남자들에게나 가라는 거야? 자기가 무슨 사랑하는 여자를 마지못해 떠나보내는, 연속극에 나오는 비련의 남자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알아? 그냥 솔직하게 날 붙잡을 용기나 자신이 없다고 말해. 그러면 믿어줄 테니까.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이던 지수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못한 채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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