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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Nov 02. 2024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 거실 창밖을 내다보니 지금까지 없었던 주택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했다. 어제까지도 없었는데. 원래라면 저곳에는 빨간 지붕의 연립단지가 있어야 했다. 마치 두브로브니크 성벽 위에서 내려 보았던 것처럼 빨간 지붕이었는데, 그 지붕들이 사라졌다. 자세히 보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주택을 지붕만 남기고 온통 가리고 있던 단지 안의 나무들이 사라진 것이다. 아, 재건축한다더니 일단 나무부터 뽑은 모양이네. 아무래도 그렇게 큰 나무들을 놔두고는 재건축할 수 없을 테니, 건물을 철거하기 전에 나무부터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겠지.

     

그러고 보면, 사람은 곧잘 시각적 오류에 빠진다. 아니면 시각 정보가 눈에서 뇌로 가는 도중 잠시 멈칫한 것일까? 분명히 있어야 하는 곳에 있어야 할 대상이 보이지 않는 경우라면, 지금까지보다 넓은 시각으로 주위를 함께 볼 필요가 있지만, 대다수 사람은 그냥 그런 상황을 흘려버리곤 한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눈에 보인 것만 맹신하다 보면 대상의 본질을 놓치기 쉽다. 나무가 없어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채, 그저 빨간 지붕이 사라졌다고만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것도 실상은 빨간 지붕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하얀 벽이 드러나 보이니 상대적으로 빨간 지붕이 눈에 먼저 들어오지 않았을 뿐인데, 그걸 빨간 지붕이 없어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수의 시야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것은 비단 빨간 지붕뿐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연호의 모습도 사라졌다. 삼십 년이다. 연호가 지수의 시야 주위를 맴돌던 시간이 얼추 생각하면 삼십 년은 넘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연호가 지수에게 무엇인가 바라고 그렇게 지수 주위에 머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눈치껏 지수가 힘들 때 나타나서 도와주고는 또 돌아보면 어느새 한 발 떨어져서 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연호는 지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어떤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신이 그어 놓은 선 안으로는 지수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다. 지수도 그런 연호에게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연호가 특별한 관계를 요구한 적도 없었으므로 그냥 덤덤하게 그런 상태를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점차 시간이 흐르고 지수와 연호도 성년이 되었지만, 둘 사이의 간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가끔은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생긴 지수가 연호를 따돌리려 한 적도 있었지만, 여전히 연호는 지수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범위 밖에서 지수의 곁을 맴돌았다. 지수가 연호의 인간성에 한 치 의심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야말로 스토킹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수가 특별히 연호에게 불편하다는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면, 연호는 지수와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넓힐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런 지수와 연호를 오래 알고 지냈던 주위 사람들은 모두 본의 아니게 연호가 지수의 남자친구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지수에게 연호는 그저 꼬맹이 시절부터 친했던 소꿉친구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은 상태로 머물고 있었다.  

   

“너는 왜 그렇게 나만 쫓아다니니? 다른 친구들도 좀 만나고 그러지 않고.” 하지만 그저 연호는 씽긋 웃을 뿐이었다. “다른 친구는 무슨. 나는 그냥 네 옆에서 지금처럼 너를 바라보는 것이 좋아.” 지수는 답답했다. 차라리 지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당당하게 남자친구의 자리를 요구했다면 지수로서도 처신하기 편했을 텐데, 연호는 단 한 번도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그랬던 연호가 얼마 전부터 지수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서 잠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루 이틀 연호가 보이지 않는 날이 계속될수록 지수의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조바심이 일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불안한 날들이 계속되었고, 둘레를 돌아봐도 보이지 않는 연호를 생각하느라 지수의 일상에도 점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물론 연락은 해 보았지만, 그저 전화나 메시지 상으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말만 반복되었고 급기야 지수는 연호에게 당장 얼굴을 보아야 하겠으니, 자기에게 오라고 요구하기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연호는 여전히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면 찾아가겠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런 메시지가 오가던 며칠 후 결국 연호의 전화기는 꺼져버렸다. 지금까지 연호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지수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그냥 두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한 달 더 흐른 어느 날, 꺼져있던 연호의 전화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저는 연호의 누나입니다. 사랑하는 동생 연호가 지난주에 우리 가족의 곁을 영원히 떠났기에, 그동안 연호와 가까웠던 분들께 알려드립니다.”  

   

단체 부고와 같은 메시지를 읽는 순간, 연호와의 지난 시간이 아침에 보았던 재건축 예정지에서 뽑혀 나간 나무와는 달리, 지수의 기억 속으로 더욱 깊이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처음부터 없었던 기억은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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