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 아홉 시경 운주시 한 주택가 골목에서 지나가던 17세 여고생 김 모 양을 둘러싸고 성추행하던 같은 또래 남학생 박모 군 등 3명을 제지하던 46세 최모 씨가 박모 군에게 심하게 폭행당해 마침 주변을 순찰 중이던 경찰에 의해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현재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저런 죽일 놈들을 봤나.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원 참. 자기들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저게 무슨 짓이냐고.”
뉴스를 보던 그가 하는 말을 옆에서 듣던 준혁이 말했다.
“요즘 얘들 무서워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니까요. 그러니 아버지도 혹시 지나시다가 저런 거 보면 그냥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시는 것이 좋아요. 공연히 봉변당할 수도 있거든요.”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 같으면 네 동생이 저런 놈들에게 저 짓을 당하는데 그냥 모른 척할래? 어디서 오빠라는 녀석이 말이야.”
“아빠는 거기에서 왜 주희 이야기가 나와요? 그리고 막말로 저 여학생이 주희도 아니잖아요. 밤늦게 골목길을 싸돌아다닌 얘의 잘못이지.”
“그러니까 말이야. 그 여학생도 어느 집 귀한 딸일 거 아냐? 그러니 하는 말이지.”
“아무튼 그런 일 보면 그냥 피하세요. 설혹 그 여학생 구해주었다고 해도 나중에라도 그놈들이 해코지할 수 있어요. 그냥 모른 척 자리를 벗어나서 신고해 주면 돼요. 알았죠? 그냥 모른 척하세요.”
아들의 말에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요즘 아이들은 다 그런 모양인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아니, 아예 잘잘못을 구별하는 능력은 날이 갈수록 퇴화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거실에서 일어나 방에 들어와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중년 남자는 또 무슨 죄란 말인가? 졸지에 한 가족의 가장이 무너지는 모습에 섬찟함마저 들었다. 그 남자도 준혁의 말처럼 그냥 그 자리를 지나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선 것을 보니 어쩌면 남학생들에게 추행당하던 여고생 나이의 딸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일 그런 것이 아니라면, 지난 세월의 낡은 기사도가 순간적으로 남자의 가슴을 울린 것일까? 뭐가 어떻게 되었든, 지금은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인 남자에게는 전혀 예견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골목에서 못된 짓을 하던 남학생을 타이르면 그 남학생들이 사과하고 물러서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했다. 그 남자의 가족에게는 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리고 만일 그 남자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여학생과 가족은 그 남자의 가족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정말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뉴스를 보고 잠들어서 그런지, 그는 생전 잘 꾸지도 않던 꿈을 꾸었다. 꿈속에 그는 고등학생이었고, 뉴스의 중년 남자처럼 똑같은 경우를 당했다. 뭐 이런 유치한 상상을 했나 싶었다. 하긴 그가 고등학생일 즈음에는 그래도 기사도가 있었다. 그리고 요즘 말로 일진이라고 하는 학생도 이유 없이 친구를 괴롭히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괴롭힘을 당하는 친구가 있으면 대신 괴롭히는 친구를 혼내주기도 하였다. 겉으로는 불량 학생이지만, 안으로는 친구 사이에 한없이 마음이 따듯한 한 명의 같은 친구였다. 그런 시절을 보낸 그는 이번 뉴스의 사건이 마냥 남의 이야기 같지만은 않았다. 꿈에서 깬 그가 일어나 주방으로 나가 찬물을 한 컵 마시고 돌아와 누웠지만 한번 깬 잠을 다시 이룰 수는 없었다. 창밖은 아직 깜깜한 새벽이었다.
골목 안 저만치에서 한 여학생을 둘러싸고 있는 불량스러워 보이는 남학생들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어차피 그가 지나가는 길목이었기에 그가 그쪽으로 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걸음이지만, 순간적으로 그는 생각에 잠겼다. 아들 말처럼 그냥 모른 척 지나가야 하나? 그러기에는 이미 발길이 골목에 접어든 상황에 어색하게 돌려 나갈 수도 없었다. 이래서 생각지도 않게 이런 시비에 말려들기도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냥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여학생은 이미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고 남학생들은 그런 여학생을 둘러싸고 뭔가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영화에서나 보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추행하려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학생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하는 모습으로 보였기에 그가 말을 던졌다.
“학생들, 보아하니 저 여학생에게 무슨 짓을 하는 모양인데, 그만하지 그래.”
“뭐래? 야. 이 아저씨가 뭐래냐?”
그중 한 명이 옆을 쳐다보며 말했다. 옆에 있던 다른 남학생도 나섰다.
“지나가던 아저씨는 그냥 갈 길 가세요. 공연히 다치지 마시고요.”
며칠 전 뉴스에서 보았던 장면이 그 학생의 얼굴에 겹쳐 보이며 그의 눈 안으로 들어왔다. 설마 했는데, 요즘 아이들이 이런가? 옆을 돌아보니 여학생은 이미 겁에 질린 눈초리로 피할 생각도 못 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잠시 아들 준혁이 한 말이 떠올랐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무조건 자리를 피하라고 했던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자리에서 아무리 물리적인 위세를 가진 어른이라 할지라도 건장한 고등학생 셋을 타이르고 무력화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물며 그가 그 정도의 무위를 갖춘 어른은 아니지 않은가? 분명 시비가 더 진행되면 그 자신도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학생들이 못 하는 말이 없네? 지금 이게 올바른 행동이라고 보냐? 어디서 배운 버릇인지 원.”
“하하하. 이 아저씨 봐라. 그냥 가시라면 가면 될 일인데, 꼭 창피를 당해봐야 알겠어요? 아저씨 그냥 가시라니까요? 우리는 쟤하고만 볼 일이 있으니까 그냥 가세요.”
한 녀석이 이제 그의 앞에 와서 손으로 어깨를 밀면서 건들거렸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주먹으로 한 대 날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 주먹 한 대 이후에는 자신이 없었다. 그가 어깨를 툭툭 치던 학생의 손을 밀치는 순간 아랫배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면서 몸이 앞으로 숙였다. 눈앞에 별이 빙빙 돈다는 표현이 바로 이런 상황을 그리는 말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이어서 등에 느껴진 가격에 그만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다. 그제야 요즘 아이들이 무섭다고 한 준혁의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지만, 바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일어난 일이지만 후회해 보아도 소용없었다. 땅에 주저앉은 그를 보면서 남학생들은 웃으면서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거 정말 아무것도 아닌 양반이 꼭 한 번씩 무게 잡고 훈시하려고 한단 말이야. 아저씨 알았으면 얼른 꺼지라고.”
“그러게, 맷집도 졸라 없는 인간이 꼭 나서고 지랄이란 말이야. 어이, 아저씨. 더 터지기 전에 얼른 꺼지쇼.”
이제 남학생들은 막 나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미 그들의 눈에는 그가 보이지 않았고, 그저 옆에서 벌벌 떨고 있던 여학생만 보였다. 한 녀석이 여학생의 팔을 잡는 것을 보고, 그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 이 새끼들 정말 안 되겠네. 대가리 피도 안 마른 새끼들이 어른에게 하는 짓 좀 봐라. 이제라도 그 여학생 놔두고 가라. 좋게 말로 할 때 꺼지라고.”
제법 호기 있게 던진 말이 그 녀석들을 더욱 자극했다.
“아이고, 그러셔? 안 가면 어쩌려고? 더 맞아 주시려고? 이 아저씨 아직 정신을 못 차렸네?”
그도 이제 더 참을 수가 없어서 호기 있게 마지막 말을 던졌지만, 실상은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봤자 나이 어린 학생들 샌드백이나 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하필 이 시간에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까? 아직 아주 늦은 시간이 아니므로 어지간하면 사람이 있을 것도 같았는데, 그가 남학생들과 시비가 붙은 지 십여 분 동안 한 명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 씨, 이 아저씨 정신 못 차렸네. 이래서 말로 해서는 안 된다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그와 시비가 일어날 기세였다. 남학생들에게 그는 여학생과 마찬가지로 그저 놀림거리, 장난 거리일 뿐이었다. 그는 그제야 비로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112를 눌렀다. 신호가 가고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여기, 주택가 골목에서 불량 청소년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남학생 한 명이 그의 손에서 전화기를 빼앗았다.
“야, 이거 몇 대 맞더니 곧바로 신고하시겠다 이거지?”
“야. 그냥 가자. 오늘은 재수가 없네. 별 병신 같은 게 걸려서 말이지.”
남학생은 전화를 끊고는 전화기를 그에게 던지고 돌아서서 골목을 나갔다. 그제야 그는 한숨을 돌리며 여학생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여학생은 아무 말 없이 마치 남학생들을 쫓아가기라도 하는 듯 남학생들이 사라진 골목 끝을 향해 뛰어갔다. 남학생도 그렇지만, 여학생도 경우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몸을 추슬러 집으로 향했다.
며칠 후 뉴스에 주택가 골목에서 10대 여학생을 강제 추행하던 50대 남성이 이를 제지하던 고등학생과 시비 끝에 고등학생에게 전치 4주의 상해를 입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경찰은 해당 피의자를 소환하여 사실을 확인할 예정이며 만일 사실로 밝혀질 경우, 관련 법령에 의거 검찰에 송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