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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Oct 21. 2024

일기예보

일기예보가 빗나가는 일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폭우가 예상된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주말 외출을 취소한 우리를 비웃듯 하늘은 더할 수 없이 맑았는데 그런 날이 잦아질수록 일기예보를 점점 신뢰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완벽하게 무시하기에는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문득 희수와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희수와의 인연은 대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고 보니 벌써 이십 년도 훌쩍 지난 일이었다. 희수와는 그저 단순한 과 선후배 사이로 만났을 뿐, 특별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시선을 끌 만한 희수의 미모에 나 역시 호감은 느끼고 있었지만, 희수의 관심이 나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기에는 희수와 나 사이에 많은 복병이 있었기에 쉽사리 가까워질 수 없었다. 그랬던 차에 희수가 먼저 나에게 다가왔다.

     

지호 선배 시간 좀 있어요? 그렇게 다가온 희수는 그로부터 지금까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떠나지 않은 것은 아니고, 더 이상 다가오지도 않은 채 내 기억의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었다. 사실 희수의 그런 행적은 내가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기묘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희수를 내가 떠날라치면, 그때마다 기가 막힌 타이밍과 수법으로 내 발을 붙잡았다. 마치 그물에 걸린 가엾은 물고기 신세처럼 내가 희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까닭은 희수에 대한 나의 무한 신뢰와 바닥을 모르고 꺼져가던 실망이 아주 균형 있게 어우러진 결과였다. 마치 믿고 싶지 않으면서도 믿어야 하는 일기예보처럼 희수의 말은 믿을 수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선배를 사랑하고 있어요. 뚱딴지처럼 다가온 희수의 말 한마디가 실망에 지쳐 떠나려던 나를 다시 붙잡았다. 하지만 그 말 역시 빗나간 일기예보처럼 신뢰할 가치가 없는 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희수의 그물에는 나처럼 갇힌 물고기가 꽤 많았다는 사실도 덤으로 알게 되었다. 거짓과 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희수의 언변은 갇힌 물고기에게 뿌려 주는 달콤한 미약媚藥이었으며, 나와 함께 갇힌 물고기들을 방류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는 사실도 거의 십 년이 훨씬 지나서 깨달았다. 

     

그 이후로 그물에서 탈출하기 위해 힘을 합쳐 그물을 물어뜯느라 정신없던 의도치 않은 동업자들은 크기가 작은 물고기부터 차례로 그물에서 탈출했고, 미처 탈출하지 못할 정도의 크기에 비례하여 희수에 대한 미련의 크기가 큰 몇몇 물고기만 그물 안에 남았다. 물론 나도 그 물고기 중 한 마리였는데, 불행하게도 그중에 내가 가장 큰 물고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에 와서의 일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는 어설픈 동지애同志愛적 신념으로 그물을 계속 갉았고, 그렇게 하다 보면 최후로는 가장 크기가 큰 나도 언젠가 그물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결국 모두가 탈출하고 텅 빈 그물 안에서 나까지 탈출하려는 시도를 인지한 희수가 서둘러 그물을 수선하려 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무사히 그물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희수는 그물에서 멀어지는 내 발을 뒤늦게 결혼이라는 말로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일기예보를 불신하듯 그녀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던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희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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