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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흔 Oct 20. 2024

미련

미련이라고는 전혀 없을 줄 알았다.

계절의 시작이 입춘이라면 사람에게 입춘은 출생이다. 따듯한 봄날에 꽃이 피듯 인생에서 가장 예쁜 시기는 당연히 사춘기가 아니겠는가? 그 시기 넘기고 더운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이면 사람은 어른이 되고, 한여름 뜨거운 햇볕 아래 맺는 성장의 결실은 아마도 자식이리라. 그러니 수확의 계절은 당연히 가을이겠고.  

    

그는 이제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했다. 가을에 열매를 따고 곡식을 수확하듯 사랑스러운 자식도 여럿 두었으니 그만하면 성공적인 인생이었다. 그러니 세상에 다녀간 흔적은 충분히 남긴 셈이고, 언제 다시 떠나온 곳으로 돌아간다 해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애꿎게도 소설처럼, 드라마처럼 불치의 판정을 받았다. 그래, 하긴 이 정도 살다 가는 것도 나쁠 건 없지.  

    

평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리하는 것이 습관이었던 터라, 그에게는 불치 판정이 그다지 갑작스럽지도 않았다. 손꼽히는 재계의 인물처럼 떠난 후를 걱정해야 할 만큼 남길 것도 많이 없었다. 당연히 편한 마음으로 그날까지 주어진 매일매일을 즐기며 보내기만 하면 될 것이다. 입춘에서 시작한 계절이 대한에서 끝나듯 그의 일생도 겨울이 오면 끝날 것이다. 대한 지나고 입춘이 다시 돌아오듯, 떠난 후에 다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추운 겨울 찬바람에 방 안에서 웅크리고 지내듯 이미 식어버린 육신을 의미 없이 붙잡는 것보다 늦가을이 지기 전에 떠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그의 마음은 차분해졌다. 그만하면 겨울 맞을 준비는 끝난 것 같았다. 이제 한로가 지났으니, 상강만 지나면 겨울인가? 아직 시간이 조금 더 남았군. 하지만 그는 점점 심각해지는 기후환경 변화를 간과했다. 이미 계절의 구분이 의미 없어져 갈 정도로, 지구도 그의 육신처럼 병들고 있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한여름 장마에도 오지 않았던 거센 빗줄기가 창문을 때렸고, 그 비가 그치면 기온이 급격하게 하강할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들은 그는, 순간적으로 내일의 추위를 걱정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씁쓸하고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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