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소금’을 읽었다. 360쪽이 넘는 긴 장편임에도 숨도 쉴 틈 없이 한 번에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를 덮으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서둘러 노트북을 열었다.
소설은 시인이자 화자인 내가 우연한 기회에 들은 한 가족의, 아니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느니 하는 통속적인 이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인생을 살아가야만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가난한 다섯 남매의 셋째로 태어나 부잣집의 고명딸과 결혼하고 안정된 회사의 임원까지 오른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걱정도 없는 행복한 가정의 가장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소설이 진행되면서 속속들이 드러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당시 사회의 여러 단면이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막내딸의 스무 번째 생일잔치를 앞둔 저녁 주인공 남자가 이유 없이 실종된다. 가족은 물론 직장에서도 그렇게 이유 없이 사라질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남자의 실종에는 지금까지의 남자의 인생 전반에 걸친 일련의 사건들 모두가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런 원인이 되는 사건 중에 그의 의지로 진행되었던 것은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점에서 남자의 불행을 엿볼 수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청년이 부잣집 딸과 결혼하는 과정부터가 혼전 임신에 의한 어쩔 수 없던 상황이었다는 점과 그 과정에서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던 첫사랑 여인과 원치 않는 이별, 친정이 망했음에도 과소비 욕구를 버리지 못한 채 허영에 절어 사는 아내와 그녀의 끊임없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한 무리한 직장생활 끝에 얻은 췌장암 말기 진단에서 벗어날 생각도 못 하고 끌려다니던 주인공은 우연히 마주친 귀갓길 행상 트럭의 적재함에 실린 소금 포대를 보고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의 지난 인생을 되돌아본다. 그의 아버지가 염전에서 일하던 염부(鹽夫)였던 까닭이다.
염전의 소금 더미에 코를 박고 엎어져서 죽은 주인공의 아버지나 부두와 선미 사이에 떨어져서 추락사한 화자인 시인의 아버지는 그 시대 아버지의 대표적 표상이다. 그다음 세대의 아버지는 주인공이 물려받는다. 격변하는 사회 여건 속에서도 아버지의 역할은 변함이 없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그 돈으로 가족의 생계와 자식의 교육을 책임져야 한다. 그리고 노동력을 상실한 노년이 되면 노인 복지라는 명분으로 요양원을 떠돈다. 그저 빨대가 꽂힌 인생을 살다 가는 것이 가장의 일생이다. 이즈음에서 작가는 가장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하는 피 섞인 가족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에 애정을 더 주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인공은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찾아간다. 자기를 키우고 공부시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아버지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한 남자, 전신이 거의 마비된 남자를 보살피며 가족으로 살아가면서 보상받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화자의 입을 통해서 주인공이 떠난 가족의 이야기와 딸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도 마음의 동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미 그에게는 가족이 아니었으며, 자기가 떠나옴으로써 남은 딸에게도 새로운 그녀들만의 인생을 준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이 가족을 떠날 때는 오죽했겠냐는 신파조의 동정심이나 공감은 필요 없었다.
아버지가 떠난 후에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 뒤에 남겨진 세 자매의 인생에서 다양한 삶을 엿볼 수 있다. 부잣집 남자를 만나 동반 유학을 떠나는 첫째, 위로라는 명문으로 다가온 아버지의 전 직장 동료와 성적인 관계로 발전하면서 그것을 빌미로 사회 진출을 꾀하는 둘째, 그리고 그나마 정상적 사고를 지니고 자기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셋째의 모습은 서로 다른 그 시절 젊은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간혹 물질만능주의적인 장면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주인공의 아내이자 세 자매의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 자매 중 누구의 처신이 올바르다고는 아무도 단정 지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살아가는 방법이 다른 것일 뿐이다.
소설에는 정말 다양한 시대상이 얽힌 서사가 등장한다. 그리고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이 모두 그런 시대상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로 등장한다. 봉제공장에서 밤을 새워 재봉틀을 돌리던 여공도 등장하고 암울한 시대를 탄식하는 지식인을 탄압했던 군사정권 이야기도 등장한다. 가족을 위해서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갖은 편법을 저지르는 직장인의 애환도 등장한다. 정말 소설의 분량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많은 이야기가 녹아있다. 그렇게 서사를 이어가다가 끝내 주인공은 가출한다. 통속적 소설이라면 가출한 가장이 나중에는 가족과 재회하는 장면을 그릴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사실 그렇게 돈 벌어주는 기계에 불과했던 가장의 자리라는 것은 진정한 가족의 일원이라는 뜻과 별로 관계가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소금에는 염도나 생산 조건에 따라 다양한 맛이 난다고 한다. 짠맛, 신맛, 단맛, 쓴맛, 매운맛까지 정말 다양하다. 작가는 그런 소금의 맛이 마치 인생의 맛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인생에도 쓴맛, 단맛 등 모든 맛이 다 있지 않은가? 그처럼 주인공의 인생은 다양한 맛으로 점철된 하나의 서사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누구든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사람이 산다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인생의 참맛은 진정한 가족과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에서 주인공을 그런 삶으로 몰아댄 것은 잉여 재산이었다. 작가는 잉여가 소비를 부르고 소비는 더 큰 욕망과 더 큰 잉여를 부르도록 운명 지워져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잉여 재산을 벌어들이는 책임을 짊어진 가장들은 어떤 일을 하든, 어떻게 일을 하든 그 잉여 재산을 충당해야 하는 책임을 갖고 살아온 것이 바로 그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가장은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없었다.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자기만의 취미조차 가질 수 없었다. 주인공도 결국 공금을 횡령하거나 거래처로부터의 리베이트를 수수하는 등의 부정행위를 자행하면서까지 가정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가족에게 그는 한낮 돈 벌어오는 기계에 불과했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흔히 박범신의 작품을 사회비판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솔직히 나는 거창하게 사회적인 문제보다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구성단위로서의 가족의 의미를 강조하는 시각으로 바라보고 싶었다. 주인공의 가족과 주인공의 가출 이후에 형성된 가족, 죽을 때까지 주인공을 기다리며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입양한 딸에게 자기의 이름과 주인공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이름을 지어준 모녀 가정, 아내를 후배에게 빼앗겨서 이혼한 시인의 가정 등 다양한 가족의 모습에서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당시의 사회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한창 경제 발전을 이룩하던 시기를 살아온 모든 아버지에게 바치는 소설처럼 읽혔다.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젊은 시절의 첫사랑 여인이었던 세희 누나를 떠올리며 불렀던 <눈물>의 노랫말을 소개하고 싶다. 소설가가 작품 안에 쓴 노랫말이지만, 어느 시인이 지은 시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진 것은 작품의 내용을 알고 있는 나만의 착각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박범신 작가는 후에 시인 겸업을 선언하고 문예지를 통해 시를 발표한다.
<눈물>
아, 달고 시고 쓰고 짠 눈물이여
어디에서 와 어디로 흐르는가
당신이 떠나고 나는 혼자 걸었네
먼 강의 흰 물소리 가슴에 사무치고
나는 깨닫네 사는 건 먼 눈물이 오가는 길
그리움을 눈물로 씻어 하얗게 될 때까지
눈물을 그리움으로 씻어 푸르게 될 때까지
사는 건 저문 강 나직나직 흘러가는 일
아, 달고 시고 쓰고 짠 눈물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