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을 풀다가 오래된 상자 안에서 한 무더기 낡은 필름을 발견했다. 필름과 함께 보관된 사진을 보면 족히 수십 년은 지났을 법한 필름들이다. 예전에는 왜 그렇게 필름을 보관했을까? 사진을 보다가 추가로 더 인화하고 싶은 사진의 필름을 찾아서 사진관을 찾은 기억은 전혀 없었는데 말이다. 차마 버리지 못했던 미련이 필름에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필름을 버린다고 나의 지난 생도 함께 버려지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필름을 꺼내 햇빛에 비추어 보았지만, 그렇게 보아서는 그 필름이 어떤 사진의 필름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이 정도로 식별할 수 없으면, 혹여 나중에 사진을 인화하기 위하여 필름을 찾았을 때도 정작 내가 원하는 필름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필름의 존재나 보존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과연 지금까지도 찾지 않고 있던 필름을 오늘 이후에라도 찾을 확률이 있을까? 모르긴 해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어쩌면 필름으로 사진을 인화하는 사진관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기껏 보관한 필름의 존재 가치가 사라지는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말없이 가위를 찾아 필름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냥 버려도 무방할 것 같긴 하지만, 행여 누가 버려진 필름으로 나와 가족, 그리고 주변 사람의 사진을 인화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필름을 꺼내 하나씩 가로로 길게 잘랐다. 소리 없이 잘려 나가는 필름을 보면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낀다. 아쉬움도 아니고 후련함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 존재할 것 같은 기분이다. 내 손에서 잘린 필름 조각은 분신 같은 사진만 남기고 곧바로 쓰레기봉투에 담겨 영원히 내 곁을 떠난다. 그리고 사진 또한 서가 위 앨범 속으로 사라지지만, 언제 다시 펼쳐질지는 나도 모른다. 사진을 자주 꺼내 보는 사람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지난 시절 사진을 거의 꺼내 보지 않는 사람은 과거를 회상할 여유조차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전자인가? 후자인가? 그것도 아니면 아예 과거를 잊고 사는 사람인가? 필름을 자르며 잠시 지난날을 회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