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일하는 도중에 전화벨이 울린다. 요양원에서 온 전화다. 잠시 일손을 멈추고 전화를 받으니, 귀에 익은 사회복지사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울린다. “지금 통화하실 수 있으세요?” “네, 일하는 중인데 괜찮아요. 무슨 일이 있어요?” “다른 건 아니고, 어르신께서 보호자님에게 꼭 한번 와달라고 하셔서요. 언제 오실 수 있으신지.” 무슨 일로 오라고 하는지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이따 오후에 갈게요. 한 세 시쯤? 미리 전화는 드릴게요.”
통화를 끝내고 나니 공연히 마음만 바쁘다. 항상 그랬다. 알고 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음에도 요양원에서 전화가 오면 하던 일도 제대로 마칠 수가 없었다. 인지력이 떨어지는 노인의 말은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다. 매사가 그랬다. 이상할 만큼 요양원 전화를 받는 날이면 그날 하루의 일정이 엉망이 되곤 했다. 이런 생각도 근거 없는 망상일 것이다. 어찌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이 요양원 전화 탓이겠는가? 그저 요양원 전화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일종의 심리적 부담이었는지, 아니면 일종의 피해의식이었는지는 모른다.
요양원에 면회를 가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얼굴을 보고 할 이야기도 없을 뿐 아니라, 할 이야기가 있어도 이미 저하될 대로 저하된 청력으로 인하여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저 서로가 하고 싶은 말만 할 뿐이다. 그 말이 상대가 원하는 대답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어차피 보청기로 해결하기에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저 나이가 많아짐에 따른 자연스러운 신체 기관의 노쇠화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먼저 들러달라고 했다고 하니, 말이 나온 김에 얼른 다녀오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요양원 면회실 입구에 서서 기다리니 아래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온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보행 보조 기구에 의지한 어머니가 복지사의 부축을 받으며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오신다. 내가 얼른 다가가 어머니를 부축하고 면회실 안으로 들어갔다. 면회실에는 밀폐된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방이 어머니와 이야기하기에는 최적이었다.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어머니는 여느 노인들처럼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다. 마치 마주한 상대방도 자신처럼 귀가 잘 들리지 않다고 생각이라도 하는 듯하다. 그러니 면회 시에는 방문은 닫고 입을 귀에 가깝게 댄 후에 최대한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 그래도 제대로 듣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런 액션이라도 취하면, 어머니도 알아듣는 척은 하신다. 아마 그런 반응도 그저 눈치일 뿐일 것이다. 내가 그렇게 가까이에서 열심히 말하는데도 당신이 못 듣는다고 하기 싫어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냥 서로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어머니는 내 말을 잘 듣지 못하지만, 어머니가 하는 말을 나는 알아들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무슨 말을 하는지 오히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은 뭐라고 열심히 이야기하지만, 나는 어머니 말의 처음과 끝이 이미 동강동강 끊어져서 온전하게 들리지 않는다. 내가 귀에 대고 “뭐라고?”라고 큰 소리를 지르면, 다시 열심히 이야기하긴 하는데 어차피 반복되는 이야기이다. 그나마 겨우 짐작할 수 있던 요지는 전화요금과 관련된 이야기였다. 원래 어머니는 내가 드린 전화기를 갖고 계시기 때문에 본인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끔 직접 전화하곤 했는데, 그것마저도 청력이 저하된 이후로는 먼저 전화를 걸지 않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담당 복지사에게 전화해 달라고 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불현듯 복지사 전화를 사용한 일에 대한 전화요금 걱정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전화요금을 계산해 주어야 하는데, 그 일은 내가 요양원에 와서 직접 해결하기 전에는 당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아들에게도 돈이 없을 텐데, 그나마 끼고 있던 가락지를 팔아서라도 돈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평범한 사람이 들었다면 어이가 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평소의 어머니라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만큼 너를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는 일종의 항변이었을 것이다.
요양원에 입소한 초기에는 거의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찾아뵈었다. 물론 내가 가려고 해서 간 것은 아니고, 어머니가 이런저런 명분으로 나를 호출했기 때문에 간 것이다. 아마 당시에는 집에서와는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불안감이나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한 차원에서 나를 불렀을 것이다. 노인들에게는 그럴 핑계가 충분했다. 보청기든 안경이든 틀니든 뭐든 생각나는 일만 있으면 불렀고, 나는 그때마다 거의 총알같이 달려가곤 했다. 아마 나에게도 무언의 강박이었는지 모른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셨으면, 그 정도의 불편함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이 아들의 도리라고 나 자신에게 강요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어머니도 아들을 불러대는 일이 점점 재미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당연히 어머니의 호출은 줄어들었고, 요양원에서도 그런 나의 변화에 반가움을 표했다. 사실 요양원 입소자들을 돌보는 데에 가장 불필요한 것은 가족의 지나친 관심이었다. 입소자가 지나치게 가족에만 의존한다면 보호사들의 말을 잘 듣지 않으려 하고, 무슨 일만 있으면 가족을 불러대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데다가 어느 한 입소자에게만 지나치게 가족이 찾아온다면, 옆에 있는 다른 입소자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럴 것 같기도 했다. 옆의 노인네는 가족이 뻔질나게 찾아오는데, 왜 자기 가족은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정말 자기를 요양원에 버린 것일까? 하는 불만과 불안감이 해당 입소자뿐 아니라 담당 보호사까지도 힘들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요양원에 부모를 모셔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논리조차 핑계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전화요금 문제는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보호사 전화요금은 내가 다 내는 거라고, 그러니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보호사에게 부탁해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물론 그 말을 어머니가 제대로 이해하셨는지 따로 확인할 필요는 없다. 어머니에게는 단지 아들이 와서, 자신이 그렇게 고민하던 문제를 말끔히 해결했다는 사실만 필요했다. 그렇게 전화요금 논쟁은 내가 요양원을 찾음으로써 간단하게 해결되었고, 그제야 어머니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이제 자기는 방으로 돌아갈 테니 나 보고는 그만 돌아가 보라고 하셨다. 그 한마디를 하려고 일하던 아들을 부르셨는가 하고 생각하자니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씁쓸한 발길을 돌렸다.
이제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요양원을 찾을 지는 나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 어머니의 마음에 달린 일일 것이다. 처음에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가도 이제는 거의 요양원 식구가 되어 잘 지내시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환가(還家) 병이 도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요양원에 계셔야 하지만 말이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신 지 사 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나는 자신이 없다. 요양원에 어머니를 모시는 것 이상으로 내가 어머니를 잘 모실 자신이 없다. 치졸한 변명이라고 해도 비난을 감수할 마음가짐은 되어 있다. 하지만 마음과 실제가 다르다는 사실은 오직 경험한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냥 그런 핑계만 늘어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