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볼펜

오만과 편견

요새 수험생들 사이에서 수험서를 여러 번 풀어보는, 일명 회독을 위한 필수품으로 지워지는 볼펜인 "기화펜"이 있다. 기화펜은 50개 이상의 리필심 형태로 판매하는데, 볼펜에 상당한 애착이 있는 나는 당연하듯 유행하는 볼펜심을 구매했다. 덤으로 본래 심을 빼고 리필심으로 바꾸어 호환이 가능한, 당근 형태를 실리콘으로 재현한 당근펜이 함께 배송되어왔다.


배송받은 “사은품”인 당근펜은 주황색이고, 볼펜 촉이 있는 곳은 좁고 점점 넓어지며, 군데군데 흠을 재현해서 꽤 당근의 형태를 갖추었으나, 애석하게도 볼펜 끝부분에 당근이 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초록색 잎사귀가 없었다.


끝부분에 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만들어졌을 때는 분명 초록색 잎사귀가 꽂혀 있었을 텐데, 어쩌다 잃어버린 건지 잃어버려 “사은품”이 된 건지 나로서는 퍽 아쉬운 일이었다.


초면에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꽤나 깨끗하게 글씨가 써져서 한동안 애정 하였는데, 나는 구매한 리필심을 빨리 써보아야 하기에 본래 펜심을 빨리 써버려야 하는 의무가 생겨버렸다. 그 의무감이 무거워 나는 원래 펜심을 리필심으로 교체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이때부터 사소하지만 당근펜과 나의 애증이 시작되었다.


당근펜은 뚜껑을 여닫는 형태로 앞쪽에 보통 볼펜 뚜껑보다는 매우 작은 돔 모양의 하얀색 부품이 끼워져 있고, 뚜껑을 끼우는 부분은 좀 더 얇은 실리콘으로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이며, 그 아래 두툼한 실리콘이 추가로 끼워져 있는 형태였다. 그런데 아래 두툼한 실리콘 부품과 얇은 실리콘 부품이 서로 분리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어찌어찌 힘으로 두 부품을 분리하고 나니 이번에는 아무리 해도 볼펜심 쪽 실리콘 부품과 볼펜심이 분리가 되지 않았다.


결국 갖은 힘을 쓰다 심의 끝동 부분만 몸통과 분리되는 지경에 이르러, 검은 잉크가 이리저리 튀고 마침 입고 있던 하얀색 바지를 못 입게 만들어 버렸다.


불쑥 화가 올라와 당장이라도 가져다 버리려고 하다가 또 펜을 아끼는 나의 팬심 때문에 빠져버린 펜심을 또 어찌 끼워 넣어 다시 쓰기로 했다. 이때부터는 이 펜은 당초부터 “사은품”인 탓에 초록 색 잎사귀도 없는 불량품이고 당초 펜심은 호환되지도 않는 한심한 물건으로 전락했다.


그렇게 생각이 든 후로는 볼펜을 잡았을 때 힘없이 좌우로 밀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고 쓸데없이 잉크도 넉넉하여 써도 써도 줄어들지 않는 골칫거리가 되었다.


한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잉크가 얼마나 줄었는지 확인하려고 펜을 분리하여 요리조리 살펴보는데 분리할 때마다 나사 방식이 아니라 뜯어내는 방식이라 답답하였다. 그리고 볼펜 촉 부분의 얇은 실리콘은 분리되지 않으니 어느 시점부터는 잉크가 줄었는지 확인도 되지 않았다.


애물 중에 애물단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잉크가 얼마나 남았나 확인해보려고 다시 펜을 분리하려다가 하얀색 돔 부분이 약간 들려 있길래 힘을 주어 몇 번 뽑아 올리려고 애쓰다 보니 어느 순간 하얀 부품이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당초에 펜촉 끝에 하얀 돔으로 된 부품이, 나사처럼 돌리면 풀리고 그리고 나면 볼펜심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 이런.


불편한 진실을 인지한 순간,

머릿속에 “편견”이라는 단어와 최근에 지인이 언급한 “오만”이라는 단어가 연상되었다. 오만과 편견이 왜 짝꿍처럼 엮여 있는지 이해가 되고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재단해 왔을까 두려움이 엄습했다.


지인은 내게 유명한 심리학 박사가 다른 사람의 일을 도와 주려다 보니 힘들어하는 이에게, 다른 사람의 일을 모두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오만”이라고 했다며, 그 말을 드는 순간 머리에 “땡”하고 종이 치더라는 말을 했었다.

나는 그 말에 "오만"이라는 게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 단언했더랬다. 내가 오만하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초록색 잎사귀가 없는 것을 제외하면 멀쩡한 것을, 초록색 잎사귀도 없는 “하자품”이며 어디서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엉성한 제품이 공짜로 제공된 것으로, 더 알아볼 생각도 없이, 엉성하게 만들어진 것이라는 편견 가지고는

추호도 의심 없이 하대 했던 것이다.


근래 2년, 나는 그전에 없이 주변인들에 대한 분노가 생기고 그들의 하는 행동이나 말에 대하여 불평과 불만이 늘어나 마음도 힘들고 머리도 힘들어하던 차였다. “왜 그들은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할 일을 지금처럼 밖에 못하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쩌면 내 “오만”의 결과이고 그들에 대한 내 “편견”의 결과 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볼펜 하나에 편견 없이 정상적인 제품이니 리필할 수 있을 거라는 평범한 기대 하에, 이리 열어보고 저리 열어보고 했더라면, 또는 물건을 산 인터넷 쇼핑몰을 다시 살펴보거나 웹서핑이라도 했다면(분명 이 제품을 돈을 주고 산 브랜드 제품이라면 나는 그렇게 해봤을 것이다) 볼펜 뚜껑처럼 된 하얀 돔 부분을 열어볼 생각을 못 했을 리가 있나.


그 노력이 충분치 않아 멀쩡한 제품을 하자품으로 바꾸어 놓았으니, 내 오만과 편견으로 쏟아낸 불평불만으로 인하여 상처 입었을 그 누군가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내 두려움의 원천이었다.


더 이상 정상품을 하자품으로 만들고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을 그만두어야겠다.


이 두려움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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