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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월 나무 Nov 25. 2022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한 달에 한 번 여고 동창생들을 만나 서울시내 투어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 달에는 종묘에서 해설사의 설명을 들은 후, 창경궁을 거쳐 창덕궁을 산책했다. 인사동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신 후, 2024년 말까지 공원으로 개방한 송현동 부지를 거쳐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 앞에 이르렀다.


 친구 1 : 아무리 봐도 저 두 동상은 너무 커.
 친구 2 : 그래? 나는 우리나라에도 저렇게 훌륭한 두 영웅이 있다는 것이 엄청 자랑스러운데!
 친구 1 : 애들 어릴 때 가끔 ‘차라리 우리나라가 영국이나 영어권 국가 식민지였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될텐데.’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친구 2 : 그래? 한글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훌륭한 언어인데.

 친구 1 : 외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말의 존칭어나 띄어쓰기 등이 까다로워서 엄청 배우기 어렵대.

 나 : 모든 언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상 다 배우기 힘들지. 그래도 한글은 컴퓨터 시대에 맞는 언어 중의 하나니까 혹시 알아? 우리 한글이 영어처럼 세계적인 말이 될지도.

 친구 1 : 어머, 내가 말을 잘못 꺼냈네. 너희 둘이 전직 국어 교사라는 걸 내가 깜빡했어.ㅎㅎ

 이렇게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우리들의 대화는 웃으며 마무리됐다.


 친구 1의 아들 둘은 지금 모두 의사인데, 그 아들 둘이 학창시절에 했을 공부 양을 짐작하면 친구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비단 그 친구만이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영어공부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특히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영어교육은 피해 갈 수 없는 문제이다.


 2002년 8월 2일 우리 가족은 최종 목적지인 오타와를 가기 위해 밴쿠버에서 통관을 하고 있었다. 큰 짐은 미리 배로 부치고 잔 짐만 가지고 가는데도 이민 가방 8개가 가득 찼다. 남편과 내가 카트에 짐을 나누어 싣고 각자 다른 줄에서 통관을 하게 되었다. 내 순서가 다가왔는데 남편은 아직 통관절차가 끝나지 않아 내가 직접 처리해야 했다. 그 해는 2001년 9.11 사태가 일어난 지 일 년이 채 안 된 시점이라 통관 과정이 꽤 길고 까다로웠다. 담당자가 나에게 무어라 두어 번 말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식은땀이 나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캐나다로 가는 것이 확정된 것은 출발하기 거의 1년 전이었기 때문에 내가 영어 공부를 할 시간이 있었다. 나보다 먼저 남편의 해외근무로 휴직을 하고 미국에서 1년을 지내고 온 동료가 나에게 영어 공부를 하고 가라고 권했다. 그런데 당시 15년의 직장생활과 육아로 지친 나는 휴직을 하게 되면 2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조건 여유롭고 편하게 쉬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의 권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영어에 대한 아무런 준비 없이 캐나다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니 통관원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첫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초등학교 5학년인 첫째가 통역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진땀을 흘리며 무사히 통관을 마쳤다. 그리고 후회했다. ‘아, 영어 공부하고 올 걸…’ 사람은 어리석게도 경험하기 전에는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실감했지만 후회해도 소용이 없는 상황이었다. 오타와에 도착해서 예쁘고 아담한 타운하우스를 렌트했다. 이웃에는 마음 좋은 아가씨가 살고 있었는데, 우리 가족을 처음 보았을 때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Hello!”

 “……”

 머리에서는 대답을 하고 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고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암울했다.


 며칠 후 지인과 그의 아들, 그리고 우리 가족 넷이 캐나다의 민속촌인 ‘Upper Canana Village’에 구경을 갔다. 안내원의 설명에 따라 코스를 돌며 관광을 하는데 안내원의 말이 한 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1년 전에 오타와로 와서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지인과 중학교 1학년인 그녀의 아들, 그리고 남편과 첫째는 그녀의 설명을 이해하며 웃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나와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만 귀머거리 신세였다. 설명을 한 마디도 못 알아듣고 따라다니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고 이렇게 2년을 어떻게 지내나 생각하니 암담했다.


 사흘을 고민하다가 남편에게 말했다.

 “나처럼 사람들과 말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으니까 이곳에서 더 이상 못 살 것 같아. 나 그냥 한국으로 돌아 갈래. 당신이 2년간 애들과 함께 지내다 와요... 

 진심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고심 끝에 아무것도 안 하고 편하게 놀기만 하겠다던 야무진 생각을 포기하고 영어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지역 커뮤니티 센터와 컬리지의 영어 교육프로그램을 알아보았지만, 수업료가 너무 비쌌다. 다행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난민들과 이민자들에게 무료로 영어 교육을 해 주는 캐톨릭 스쿨을 알게 되었다. 일반인들도 1시간에 3달러의 수업료를 내면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수업을 듣기 전에 레벌 테스트를 했다. 테스트 결과 말하기는 문맹 수준이었으나 쓰기나 읽기 때문에 겨우 Beginner 2반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저렴한 수업료 때문에 그곳에는 난민과 이민자들 외에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 멕시코나 페루 등 남미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고, 중국, 일본, 혹은 간혹 유럽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다. 모두 초보 영어 수준이니 소통이 제대로 될 리 없을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의사전달이 됐다. 함께 야외 체험학습도 가고, 각기 자기 나라의 음식과 의상을 준비해 와서 문화를 소개하는 수업도 했다. 시간이 흐르고 서로 가까워진 후에는 서로 초대해서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이켜보면 영어 공부를 했기 때문에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캐나다로 온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고, 그들과 더불어 행복한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더불어 내 삶도 다채로워졌다.

 그곳에 있는 동안 여행을 하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캐톨릭 스쿨에 가서 9시부터 12시까지 영어 공부를 했다. 모두 영어가 서툴러서인지 말을 잘 못하고 틀리게 말해도 서로 개의치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리 없는데 그때는 서로의 말을 다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방과 후에 마트에 가서 현지인과 이야기하기를 시도했고, 이웃집 아가씨와 대화도 나누고, 아이들 학교 학부모 모임이나 상담에도 참여했다. 겁먹지 않고 시도했다. ‘grammar in use beginner와 intermediate’로 문법을 공부하며, 가끔 책에 있는 좋은 예문들을 외우며 스피킹 공부도 같이 했다. 정말 좋은 책이었다. 아침에 학교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날 가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연습하기도 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오늘 했던 표현을 되짚어 보기도 했다.


 3개월만 공부하면 기본 회화가 되고, 2년을 살면 자연스러운 말하기는 물론이고 영어 신문도 술술 읽을 것이라는 야무진 착각을 했다. 내가 중, 고등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의 영어교육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마흔이 다 돼서 재미로 잠시 하는 영어 공부에 실력이 쑥쑥 나아질 리가 없었다. 겨우 생존 영어 수준에 이르렀을 때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생각해 보면 영어 공부보다 친구들 만나서 노는 재미로 학교에 갔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돌아와서 정신없이 사느라 15년 정도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다. 둘째가 유학을 가고, 첫째가 외국에 살 가능성이 많아 보여 다시 영어 공부에 관심이 생겼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ebs영어를 그냥 틀어 놓는 경우가 많다. 퇴직하고 6개월 정도 유튜브와 전화영어를 했는데, 절박함이 없이 재미로 하는 것이라 실력이 늘지는 않았다. 외국 여행 가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간단하게 여행의 즐거움이나 서로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위기 상황이 닥치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정도의 회화 실력을 쌓고 싶은데 쉽지 않다. 


 나는 영어 예찬론자는 아니다. 다만 영어 능력이 초, 중, 고 교과공부나 수능과 취업 및 직업 현장에서 직무 수행을 위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소통하는 순수한 즐거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과 간단하게 서로의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낯선 곳에서 여행의 즐거움을 나누는 기쁨을 영어를 통해 누릴 수 있다면 영어를 공부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지금은 게을러서 영어 공부를 안 하고 있는데, 언젠가 다시 시작하고 싶다. 영어 능력을 통해 소통을 기쁨을 누릴 수도 있지만, 영어 공부 자체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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