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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Sep 10. 2023

우린 성공한 걸까

잃은 것과 얻은 것

 

 우리는 약자였다.


비즈니스도 자리가 잡혀 욕심부리지 않고 몇 년은 더 버틸 작정이었다. 그러나 샵 리스기간이 2년쯤 남은 시점에 건물주인은 더 이상 리스를 주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어쩌면 옆집 불란서 베이커리가 먼저 선수를 친 것 같기도 했다. 허름한 동네에 고급진 베이커리가 들어서니 손님들이 몰려왔다. 사람은 누구나 대접받고 싶어 하는 존재. 베이커리카페는 날마다 긴 줄이 이어졌다. 불란서 셰프는 건물주에게 샵을 확장할 의사를 밝혔고 결국 우리 샵이 물려 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약자에 속했다. 이민 사회에서 느끼는 소외감 아니면 갑질? 그도 아니면 왕따?

비즈니스를 지속하려면 다른 곳에 다시 시설을 해야 했다. 시설 투자비를 오롯이 부담해야 한다. 진퇴양난이었다. 리스가 얼마 남지 않는 상황에서는 매매하기도 어려웠다. 신문에 광고를 내긴 했다.


 그때 매니저였던 샐리가 샵 인수에 관심을 보였다. 초창기 때부터 함께 일한 기술자였다. 그도 우리 샵에 많은 기여를 한 종업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샐리도 시설비가 부담되었다. 가격을 낮춰 달라고 했고 우리는 그동안의 기여도를 생각해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쉽게 정리는 됐으나 샵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이제는 욕심을 내려놓아야 할 것 같았다.  


 마무리가 되자 우리는 그냥 놀고 쉬었다.

짐에 가서 운동하고 계절과 상관없이 골프를 치고 가끔은 해외여행도 떠났다. 샵을 처분한 돈은 그렇게 쓸 참이었다. 그러나 벌지 않고 쓰는 일은 대책이 없었다. 손에 남는 것이 점점 얇아지자 앞날에 대해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했다. 계속 이곳에서 이렇게 은퇴 후 삶을 살아야 하는지,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처음 비즈니스를 시작했을 때 이민을 생각하거나 아주 영주할 것으로 계획하지 않았다. 너무 이른 퇴직이라 할 일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왔다. 그저 달콤하기만 했던 30대의 주재원 생활, 커리어를 연장해 보려 학문을 다시 지속하며 저글링을 했던 40대, 그리고 그동안의 커리어를 모두 접고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온 여정.


 사실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으로 집도 렌트로 살았고 먹는 것은 풍요로워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여유가 생기면 저축보다는 여행을 다녔다. 열심히 일한 우리,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이라 생각하면서. 바하마와 뉴잉글랜드 크루즈, 캐나다와 멕시코, 스페인과 포르투갈, 서유럽과 알프스, 베네룩스 삼국과 모나코, 아이슬란드까지. 여행은 늘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눈뜨게 해주는 청량제였다.

  

 뉴욕을 문화적으로 다시 음미할 수 있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다. 틈틈이 공연을 보러 가기도 하고 미술관 탐방을 즐기기도 했다. 특히 공휴일이나 할리데이가 오면 쓸쓸해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번잡한 맨해튼으로 나갔다. 센트럴파크도 자주 들렀지만 지금은 아이스링크와 예쁜 소품가게들로 변모한 나름 낭만이 있던 브라이언트 파크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며 멍 때리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우리는 이미 그때 멍 때리기에 심취해 있었다.

 

 어쩌면 가장 남는 것은 나의 문학과의 해후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무언가 쓰고 싶다는 열망은 있었으나 현실의 일들로, 때로는 자아 성취라는 이름아래 문학은 늘 밀려나 있었다. 다행히 뉴욕에도 한인문인협회가 있어 기웃거리게 되었고, 그동안 경험했던 외로움과 우울, 이민자들의 애환, 이웃들에 대한 연민을 글로 쓰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총기 사건과 절도 등 치안문제와 인종차별, 이민자에 대한 편견 등 사회적 문제는 남아 있지만 뉴욕이 더 윤택하고 풍성하다는 것은 큰 장점이기도 했다. 늘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다는 , 집 가까이 5분 거리에 골프장이 있다는 ,  공원과 도서관도 바로 지천이라는 ... 쾌적한 환경과 다양한 기회면에서는 뉴욕을 놓치기 아까웠다.



 이렇게 저렇게 저울질을 했지만 지금부터 남은 시간을 가족이나 친지, 친한 친구 없이 이국에서 사는 것은 너무 삭막할 것 같았다. 은퇴 후 삼 년을 살았지만 외로움의 무게는 줄어들지 않았다.

귀국을 결정했다. 오랫동안 기다리다 손에 쥐었던 영주권. 없으면 불안하고 있어도 보자고 하는 사람 없는 그린카드. 막상 포기한다고 생각하니 아쉽긴 했다. 시민권을 신청하지 않은 일은 잘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집주인에게 계약 종결을 알리고 살던 집 물건들을 유학생 사이트에 올렸다. 은행계좌를 닫고 신용카드도 정리했다. 타고 다니던 자동차도 중고차 딜러에게 내놓았다. 미니멀하게 살았어도 십오 년 삶의 터전을 떠난다니 마무리지어야 할 것이 많았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니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남들은 걷지 않은 길, 다른 세상에서 다른 인생을 살아본 경험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진화하고 발전해 갈 것이다. 

함께 웃고 사랑하고 위로가 되어 주었던 수많은 장소와 이웃들을 잠시 그려보며 그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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