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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반짝 Oct 27. 2022

희부윰의 세계

희부윰하다. 희부윰한 것이 어두운 거실을 가로질러 방으로 서서히 다가온다. 놀란 것도 잠시,

“엄마. 나 무서워서 잠이 안 와. 죽을까 봐 무서워. 나도 엄마도 죽을까 봐 무서워.”

열두 살 난 아이의 울음 섞인 고백에 목울대가 뜨거워진다. 슬픔이 목울대로 응축되는 것 같다.

“쉬‑ 쉬‑ 걱정 마. 죽지 않아. 우리는 죽지 않아.”

아이의 등을 쉴 새 없이 쓸어내리며 괜찮다는 주문을 왼다. 마치 다짐처럼. 죽지 않겠다는 결심처럼. 이 밤, 아이를 잠 못 들게 억누르는 죽음의 그림자는 무엇일까. 


두 노인이 있다. 아래로 꼬부라지다 못해 사그라들고 있는 나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들이 기거하는 집에는 특유의 냄새가 더부살이를 한다. 기름이 바짝 빠진 푸석한 몸의 어디에서 샘솟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름 냄새. 정체불명의 기름 냄새로 얼룩진 집을 방문하기로 한 날이다. 현관문에서부터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는 초인종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몇 번의 전화 끝에 겨우 들어간 집에는 작은 두 노인이 덩그마니 앉아 있다. 예의 기름 냄새를 물큰하게 풍기며.


아이는 냄새에 민감하다. 집 안으로 들어서는 아이의 얼굴을 슬쩍 보니 눈썹을 찌푸리고 있다. 농익은 서글픔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애써 무시한 채 할머니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냉장고 맨 아래칸 구석에서 아무도 찾지 않아 말라버린 사과 같았다. 수분이 빠질 대로 빠져 조글조글한 사과. 더 이상 쪼그라들 수 없을 것 같은 사과처럼 할머니는 시간에게 물기를 모두 내어준 듯했다. 부석한 할머니의 두 손이 바쁘다. 내 손을 만지느라, 이가 몇 개 남지 않아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입을 연신 가리느라, 헤집어진 머리칼을 단장하느라 떨리는 할머니의 손이 부산스럽다. 분주한 와중에도 멀찍이 서 있는 아이를 본 할머니의 탁한 눈빛은 한층 더 흐려진다. 늙음이 수치를 모르게 하지 않는다. 늙음이 부끄러움을 가려주지 않는다. 


의무적인 안부 인사가 끝나자 두 노인의 고요한 집에 잠시 일었던 소란함도 뚝 그쳤다. 곧바로 상이 펴지고 음식들이 차려졌다. 나는 컨베이어 벨트 앞 노동자처럼 준비해 간 음식을 빠르게 차려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하듯 천천히 음식을 드셨다. 두 노인은 중력을 거슬러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인 같았다. 이 세계의 시간과 중력이 이들을 비켜가는 것일까. 갑자기 아이가 헛구역질을 하며 입 안의 밥을 뱉어냈다. 발간 눈에 맺힌 눈물로 무람없는 진심을 보이는 아이. 혐오감에 혼란스러운 어린아이의 빨간 얼굴을 보며 내가 아이의 나이였을 때를 떠올렸다. 나의 작은 두 노인은 검은 머리숱이 풍성했고, 허리가 곧았으며, 목소리가 컸다. 


할머니 집에서 방학을 보내고 돌아온 뒤면 책상에 할머니 사진을 붙여 놓고 밤마다 울곤 했다. 장난감 카메라처럼 스위치를 누를 때마다 계절이 스치듯 지나가고 다음 방학이 돌아오길 바랐다. 방학을 보낼 짐 가방을 메고 기차역에 내리면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마중을 나와 계셨다. 자전거 뒤에 앉아 할아버지의 등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내가 아기였을 때 덮던 담요를 꺼내 놓고 기다리셨다. 그곳에서 보내는 방학은 길지만 짧았다. 하루는 할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 쌀 튀밥을 튀겨 왔다. 또 하루는 할아버지와 국민학교 운동장에 가 자전거 타는 법을 배웠다. 철없이 부리는 반찬 투정에 소문난 스크루지였던 할아버지는 슈퍼에서 분홍 소시지를 사오셨다. 할머니는 분홍 소시지에 노란 계란물을 입혀 부쳐 주셨다. 자전거 특훈은 효과를 발하지 못했지만, 나는 지금도 식당에서 분홍 소시지 반찬이 나오면 가장 먼저 집어 든다.


사그라지고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아이가 아니라 어쩌면 나인지도 모르겠다. 바쁜데 자주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드문 방문에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죽을 때가 됐는데 안 죽고 신경 쓰게 한다는 말이 통점을 자극한다. 무엇이 두 노인을 이토록 신산하게 하는 것일까. 명멸하는 두 노인이 옅은 목소리로 내보내는 말들에 나는 다음에는 더 많이 차려 오겠다며 뜨거워진 목울대를 허풍으로 덧씌웠다. 부러 웃으며 한 말은 기약 없는 약속을 담아 곧바로 증발했다. 할머니는 내 어릴 적 담요를 덮고 자리에 누우셨다. 해졌지만 온기가 있어 버릴 수 없는 담요처럼 부석한 할머니의 손은 따뜻했다. 그 온기에 얄팍한 안심을 얻어 일어선다.


몇 달 만에 다시 찾은 할머니는 이불 끝에 옹그린 채 누워 계셨다. 이 세계의 모든 시간이 할머니에게로 수렴된 것 같다. 열두 살 난 아이의 눈에도 시간에 매몰된 할머니의 모습이 물큰하게 풍긴 걸까. 쪼그라든 사과 같던 할머니가 이번에는 달리 보인다. 쪼글쪼글하게 말라비틀어진 시간을 지나 마침내 문드러진 사과. 진물이 차올라 물컹하게 부은 사과 같았다. 쪼글쪼글한 사과는 껍질을 두텁게 깎아내면 어느 정도 속살이 살아있다. 뭉그러진 사과는 썩은 부분을 도려내도 안쪽이 더 크게 썩어 있어 살려낼 방도가 없다. 할머니의 시간은 기어코 썩은 사과에까지 가닿았다.


눈을 뜰 힘도 없는 할머니의 몸이 쉴 새 없이 떨린다. 목소리를 낼 여력도 없는 입에서 ‘아구아구’ 앓는 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온다. 1934년에 생이 시작된 할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다 살았다는 말. 이제 그만 죽고 싶다는 말. 부러 하는 말이 아니기에 알량한 안심 따위는 챙길 수도 없었다. 생으로부터 놓여나고 싶은 갈망과 죽음이 평안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 할머니의 입에서 자물린다. 그럼에도 온기가 여전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이쪽으로 계속 당기고 싶은 이기심이 고개를 쳐든다. 뭉그러지는 할머니의 손을 애써 잡아당기는 내 모습에 2011년에 태어난 아이가 공명한 것일까. 죽음 앞에서 인력을 발하는 아흔의 할머니와 척력을 내는 열두 살 난 아이. 그 간극이 광막하다. 


다시 두 노인을 덩그마니 남겨두고 아빠의 산소를 찾았다. 묘비 앞에 윤기 나는 사과 한 알을 올리고 안부를 전했다. 바빠서 자주 못 왔다고 가붓하게 말했다. 그 세계는 칠흑의 어둠만을 담고 있는지 반짝이는 빛이 들이치기도 하는지 물었다. 할머니의 믿음대로 평안을 주는지도 캐물었다. 필멸성(必滅性).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진다. 모든 것이 불공평한 이 기이한 세계에서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것만은 공평하다. 나의 아빠는 죽었고, 나의 할머니도, 나도, 나의 아이도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모든 생은 유한하고 모든 인간은 희부윰한 죽음의 세계로 명징하게 점철된다. 나의 기원(起源)이 저무는 그 길에 온화한 봄바람이 동행하기를 기원(祈願)한다. 사위고 남은 재가 봄바람에 사뿐히 날아오르기를.


반드러운 사과를 쪼개 아이들과 한 쪽씩 나눠 먹었다.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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