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의식을 지배한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누군가의 ‘허언명령’처럼. 나이에 따른 ‘자리’는 우리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합의된 명제이다. 나이대의 계단마다 요구되는 언행, 차림, 성취, 사회적 위치 같은 지표들이 족쇄처럼 걸려 있다. 이 지표들은 ‘나이의 제자리’를 측정하고 측정값은 개인의 품위로 귀결된다. 지표가 가리키는 대로 제때 제자리에 있지 못하면 나잇값도 하지 못하는 볼품없는 사람으로 인이 박힌다. 나이에 걸맞은 사람이란 어떤 것일까? 지표는 샘물 같이 명징하다가도 안개처럼 희부윰하다.
흐르는 세월에 따라 쌓인 나이는 그 숫자의 의미를 알아채기도 전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다. 어떻게 살 것인지 가늠해보기도 전에 사회적으로 학습된 인식구조가 나이의 틀을 먼저 만든다. ‘이 나이에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자기 합리화와 ‘이 나이에 이것도 못 해?’라는 타자 불합리화. 합당한 자신과 합당하지 않은 타인을 표로 만들어 나눈다. 지표의 칸마다 동그라미를 하나하나 매기며 타인의 공란을 비웃고 알량한 안심을 얻는다. 내면화되지 못한 나이는 단순히 숫자로 지표 위를 유령처럼 떠돈다.
나는 불혹이다. 불혹의 여성을 상상해보자. 하이엔드 브랜드 옷과 신발, 가방을 착장하고 티 없이 반짝이는 중형 세단을 타고 다니면 대개 품위 있는 중년 여성으로 여겨진다. 편한 옷차림으로 동네를 걸어 다니면 찬거리를 사러 나온 ‘그냥’ 동네 아줌마가 된다. 민낯에 주름이 부풀다 만 풍선처럼 늘어져 있으면 어쩐지 고단해 보이기까지 한다. ‘걸맞음’을 강요하는 겉모습의 지표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이토록 쉽게 결정한다. 보통의 삶조차 굽이치는 인생처럼 보이게 한다. 이때 내면의 가치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외면이 내면을 압도하지 않는다고 확언할 수 있을까? 거꾸로 된 겉모습 때문에 평생 정체성에 고통을 받았던 벤저민조차도 힐더가드의 노화에 실망했다.
[1]
나이에 따라 손에 움켜쥐어야 하는 지표 사이에서 주름은 모래알처럼 빠져나가야 하는 모순이다
.
검은 돌바닥 위에 길게 늘어선 의자. 앞, 뒤로 등을 맞대고 앉게 배치된 의자에 여성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다. 검은 바닥 때문인지 통유리창으로 빛이 가득 들이치지만 실내는 어둡기만 하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들의 표정이 컴컴한 바닥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그녀들은 저마다 어떤 이유로 이곳에 앉아 있는 걸까? 호기심이 일지만 일일이 눈을 맞추며 들여다볼 용기는 없다. 때마침 내 이름이 불린다. 데스크에서 바비인형처럼 서 있던 직원이 나를 진료실로 데려간다.
“여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시면 원장님 오실 거예요.”
“네.”
떨리는 마음을 가느다란 목소리에 숨기고 짐짓 덤덤한 척을 한다. 익숙하지 않은 의료용 의자에 앉아 손가락을 하나하나 마주대고 꼼지락거린다. 의자가 높아 허공에 붕 뜬 다리를 내려다보니 발가락이 곱아든다. 생경한 진료실 풍경은 그녀와 나 사이의 공백을 삭막하게 몰아붙인다.
“피부가 정말 좋으세요.”
숨 막히는 공백에 등 떠밀려 다급하게 외쳤다.
“아.. 화장발이에요.”
약간 쑥스러운 듯 수줍게 웃는 그녀는 긴장이 조금 풀어진 듯했다. 정작 떨려 죽을 것 같은 사람은 시술을 앞둔 나인데. 떨림은 내 입을 마음대로 움직이게 했다.
“아니에요. 피부가 정말 신기할 정도로 곱고 예쁘세요.”
신기할 정도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나의 세계에는 없는 20대 여성의 탱탱볼 같은 피부가 생소했다. 곱다라는 말은 할머니가 내 볼을 주무르며 하던 말인데 젊은 여자를 바라보는 내 마음도 이제 할머니의 그것처럼 된 것일까. ‘젊은 여성’이 타자화되는 순간. 알 수 없는 자괴감이 차오를 무렵 의사가 들어왔다. 내 눈 밑에 파란 동그라미, 빨간 동그라미를 하나씩 그리고 떠났다. 이제 불룩하던 내 눈 밑 지방은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얼굴에 쳐진 동그라미는 ‘주름’ 지표 칸을 공란으로 만들 것이다.
수술실의 생경함은 진료실의 그것보다 훨씬 쌀쌀했다. 수술실 간호사들은 인공지능 로봇같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수술실의 자동문이 열리자 간호사 한 명은 나를 끌어다 수술대 위에 눕혔고, 다른 한 명은 내 팔과 다리를 결박하고, 또 다른 한 명은 내 얼굴에 터번을 씌우며 질문을 난사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돼지가 햄으로 분쇄되는 것처럼 일련의 과정들이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정교하게 짜인 시스템은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나는 누구인지. 복제인간에게 자아가 생기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 영화 <아일랜드>
[2]
처럼
.
“눈 감으세요. 혈관에 바늘 들어갑니다. 키랑 몸무게 몇이에요? 혈액형 뭐예요? 주량 얼마예요?”
턱부터 조여진 터번은 귀를 막았고 눈을 감고 있어 오감이 흐릿했다. 눈앞은 뿌옇고 귓속은 윙윙거렸다. 뇌에 안개가 자우룩이 내려앉았다. 퇴화된 눈으로 희미한 빛에 의지해 기어가는 ‘무족영원(無足蝾螈)’이 된 것 같았다. 공포에 본능적으로 꿈틀거리는 사지는 곧바로 저지당했다. 결박은 더 강해졌고 무채색이던 목소리는 강압적으로 변했다. 나는 자발적으로 고문실에 들어온 실험체였다.
“움직이지 말고 대답만 하세요! 주량은 얼마예요?”
“매, 맥주 여섯 캔..”
“네?”
“맥주 3000이요!!”
“잠 오는 기분 들어요?”
나는 아니라는 대답을 마지막으로 기억을 잃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내 이름과 일어나라는 말. 희미한 소리를 따라가자 어느새 수면실의 포근한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수술대를 내려와 휠체어에 실려 수면실의 침대에 눕기까지의 과정이 기억에서 통째로 사라졌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편집한 것처럼. 혼곤했다. 눈 밑 지방이 재배치된 것인지 뇌를 재배치당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벌어진 일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오른쪽 손목에 남은 바늘 자국뿐이었다. 시간을 거스르는 것은 기억이 통째로 잘려나가는 일이다. 나이를 역행하려는 것은 삶의 일부분을 들어내야 가능한 것이었다.
야간 근무로 혼곤한 잠에 빠진 남편을 무자비하게 깨웠다. 내 눈 밑을 좀 보라고. 내 눈 밑 지방은 제자리에 있지 않다고. 제자리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은 죄악이라고. 그리하여 나는 죄인이라고. 별안간 비몽사몽한 남편의 눈에도 안개가 내려앉았다. 몽롱한 수면실의 침대 위에서 그날 남편의 눈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불혹이라는 나이에 의식을 지배당한 것만 같다. 빛과 어둠이 한데 섞여 부옇다. 어쩌면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희부윰한 안갯속을 유영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눈도 발도 없이 빛과 어둠만 간신히 구별하여 땅 위를 기어다니는 무족영원처럼. 그것이 눈 밑 지방이든 생을 살아내는 일이든. 4억 년 전 공룡시대부터 살아온 원시 양서류, 무족영원. 그럼에도 여전히 미지(未知)의 동물인 무족영원처럼 미지의 길을 가는 인간도 여전히 미지의 동물이 아닐까. 삶은 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지수이니까. 미지수인 삶을 유영하다 보면 언젠간 제자리에 도착할 것이다. 빛과 어둠을 제대로 구별하는 한.
[1]
F.
스콧 피츠제럴드, 「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2]
The Island(2005),
마이클 베이 감독, 이완 맥그리거, 스칼렛 요한슨 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