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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반짝 Oct 24. 2022

손이라는 세계

바야흐로 봄, 흩날리는 벚꽃잎이 코 끝을 간질이는 계절이다. 이런 날씨의 휴일을 모른 척할 수 없어 아이들과 집을 나섰다. 가방에 돗자리 하나 넣고 봉지에 음료수 하나씩 담아 나선 걸음. 아이들은 너른 공원을 자전거로 누빌 것이다. 나는 공원 가득 만발한 벚꽃을 만끽할 것이다. 저마다의 기대와 예상으로 발걸음이 날아오른다. 첫째 아이는 자신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따로 챙겼다. 둘째 아이는 돗자리 가방을 기꺼이 맡았다. 우리 동네는 시골처럼 정해진 시간에 시내버스가 운행된다. 버스를 놓칠세라 음료수를 담은 봉지가 포물선을 그리도록 뛰었다. 간신히 도착한 버스정류장, 버스는 전전 정류장을 출발하고 있다. 출렁이던 음료수가 기포를 뿜어내며 한숨을 돌린다.


바야흐로 벚꽃의 계절, 휴일의 공원에는 사람들이 벚꽃잎만큼 몰려 있다. 자전거 대여소의 줄은 구름 건너편까지 이어져 있는 듯하다. 끄트머리로 가서 줄을 서자 둘째 아이가 손을 잡아온다. 눈꺼풀이 처지고 목소리가 사그라든다. 아이의 마음이 쪼그라들고 있다는 표식이다. 자전거를 타고 싶지 않다는 아이. 그냥 돗자리에 앉아 있고 싶다는 아이. 아빠 없이 우리끼리 온 공원에 사람들이 북적이니 불안한 모양이다. 아이가 내 손을 그러잡고 안전한 네모의 칸, 우리들의 돗자리로 잡아끈다. 달의 인력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바닷물이 차오르듯 마음이 부푼다. 


손은 마음을 일렁이게 한다. 늘 처음은 손이었다. 잡은 손에, 잡힌 손에 마음이 차오른다. 어쨌든 손을 잡으면, 아무튼 손을 잡히면 시작되고 만다. 연애라는 감정이 발효가 잘된 빵처럼 부풀어 오른다. 달의 인력(引力)처럼 인력(人力)으로 풀 수 없는 일. 손은 나를 이끌고 다른 세계의 문을 연다. 첫 번째 손은 가녀렸다. ‘선배 손은 여자 손 같아요.’ ‘별로야?’ ‘예뻐요.’ ‘잡아볼래?’ 여린 손은 대학생활의 문을 열어 주었다. ‘산소 학번 손은 이렇구나. 길쭉한데 아기 손이네.’ 수줍게 포갠 내 손을 잡고서 영문 모를 투쟁을 하며.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에 사이다를 섞어 마시며. 국사책에 몇 줄로만 지나가는 한국 현대사를 세세히 훑으며. 털털거리는 선풍기 밑에서 닳은 매직을 꾹꾹 눌러가며 대자보를 쓰던 학회실에서. 깨진 시멘트 담장과 슬레이트 지붕이 늘어선 하숙집 골목에서. 3000원짜리 안주만 파는 학사주점에서. 하얀 손은 새 시대로 진입하지 못한 90년대 대학 풍경을 표표히 보여주었다.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처럼 지지직거리며.


두 번째 손은 두터웠다. ‘내 손 잡아. 그 형 손은 그만 놓고.’ ‘곰 닮았어, 너.’ 곰을 닮은 커다란 손은 자신의 모든 처음을 나와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내 손은 그의 ‘첫 손’이 되었다. 우리 시대라는 새 천년의 대학생활을 누비며 청춘의 터널을 함께 지났다. 대학가를 부유하던 90년대의 찌꺼기는 빠르게 사라졌다. 무엇을 위해 모인지도 몰랐던 등록금 투쟁은 지우개만 한 USB로 돌아왔다. 학회실 천장에는 에어컨이 설치됐고 새것으로 교체된 매직은 종이 위에서 미끄러졌다. 대학교 주변은 신축 원룸이 즐비했다. 사이다 대신 꿀을 탄 막걸리가 유행했다. 꿀막걸리는 이름대로 달았다. 달아서 꿀꺽꿀꺽 마시는 동안 시간은 꿀떡꿀떡 잘도 흘렀다. 꿀에 절인 청춘은 먹지 못 하는 설탕 덩어리로 굳었다. 쇠락한 것은 하숙집 골목만이 아니었다. 새 천년의 달콤함에 취해 내일을 준비하지 않은 청춘은 나락이다. 새 시대는 쉴 새 없이 도래하고 머물러 있는 것은 낡기 마련이다. 나는 그의 첫 손이었다가 첫 키스, 첫 연애를 지나 첫 이별이 되었다. 


세 번째 손은 생경했다. 그동안 본 적 없는 손이었다. 접점 없는 손은 거침이 없었다. ‘지금부터 손 잡을 거야. 싫으면 말해.’ ‘싫은데.’ ‘싫어도 잡을 건데.’ 싫어도 잡겠다는 불온한 말에 그럼 손만 잡으라고 했다. 손을 잡으면 감정이 비처럼 들이칠 것을 알면서도 어쩌자고 손을 내놓은 것일까.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람없이 잡은 손은 힘이 셌다. 사랑과 청춘을 통째로 상실한 고통으로 좀먹던 나를 단숨에 끌어올렸다. 억지로 이어 붙인 듯한 손은 어느샌가 잇닿아 있었다. 완벽한 타인에게 완전히 섞여드는 과정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실제로 맞닿은 손과 손 사이에 말은 별 힘이 없었다. 온기만이 조용히 스며들 뿐이었다. 낯선 것도 잊을 만큼. 따스함을 품은 손은 연애의 결말, 결혼이라는 세계의 문을 열었다.


낯선 곳에서 엄마 손을 놓치고 홀로 서 있는 아이처럼 불안이 오랜 시간 심연을 유영해왔다. 무수히 지나치는 사람들 속에서 떨고 있는 손을 올올이 잡아줄 다른 손을 기다려왔다. 아이를 안전한 돗자리로 데려가듯 다른 세계의 문을 열어줄 손을. 내가 잡은 손은 나를 어떤 세계로 데려다 놓았을까. 손을 잡을 때마다 세계는 미묘하게 뒤틀렸다가 다시 모양을 형성했다. 휴일의 공원, 아이들이 무구하게 불고 있는 비눗방울처럼. 빨대에 불어넣는 숨의 강도에 따라 비눗방울은 여러 형태로 어그러지다 이내 둥근 모양으로 빠져나온다. 모양을 이룬 비눗방울은 기대와 달리 곧바로 터지거나 예상보다 긴 시간 동안 하늘 위로 떠오른다. 비눗방울 표면에 묻어 있는 숨결처럼 내가 잡았다가 놓은 그 손들은 내 손에 묻어 있다. 지금 나의 세계는 다른 손이라는 세계를 통과하며 빚어진 모양이다. 내 손을 잡았다가 놓은 그 손에도 내 손이 묻어 있을 것이다.


손이라는 세계의 끝에서 이제 나의 손은 아이들의 손을 잡는다. 아이들이 만드는 비눗방울에 어떤 세계가 담겨 있을지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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