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 사이의 속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 일은 탈이 나고 만다. 내 삶의 항로에서 이 말은 언제든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제대로 거절하지 못하고 마음이 동하지 않는 일에 억지로 품을 들이다 늘 탈이 났기 때문이다. 나는 집사다. 신앙보다는 시가에 대한 의무로 일요일마다 교회에 간 지 십여 년이 지났다. 믿음의 가정인 시가에서 교회는 신성불가침의 영역, 무조건의 영역이다. 당연하게도 남편은 모태신앙이다. 남편이 가진 신앙심의 밀도와 관계없이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신앙인으로 결정지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남편은 회사라는 방패 뒤에 숨어 평신도의 신분을 지키고 있다. 교회에는 꼬박꼬박 출석하지만, 신앙심의 척도로 보면 나이롱 신자인 내가 올해 집사라는 직분을 받은 것은 모순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다.
일요일, 아니 주일 예배를 마치고 아이들과 동네를 걸었다. 나는 걸음이 빠르다. 목적지가 있는 걸음에 ‘쉼’은 없다. 나는 다른 이의 걸음을 방해하지 않고, 또 내 항로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큰길을 따라 거침없이 걸어갔다. 아이들은 ‘문방구 쇼핑’을 위해 열 걸음 정도 앞서서 걷는 중이었다. 때마침 걸려온 남편의 전화에 걸음을 늦추고 목사님의 설교 말씀에 대해 불경한 감상을 쏟아냈다. 그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중년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손에 들린 전단과 작은 형체의 물건. 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짐작이 갔다. 마주친 눈을 슬며시 거두고 내 쪽으로 오지 않길 바라며 통화에 집중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년 여성은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내게 디밀어진 전단을 보고 전화기를 들고 있는 내 손을 보이며 미안한 눈짓으로 고개를 꾸벅였다. 사실은 여기서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통화 중인 내 쪽으로 그녀가 다가오지 않았다면 나는 굳이 미안한 채 품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중년 여성은 순일하게 무람없었다.
“수제 비누예요.”
“아… 괜찮아요. 저 통화 중이라….”
“이거 좋은 건데……?”
그녀의 표정은 정말 모르겠다는 어린아이의 얼굴과 같았다. 마치 이 맛있는 크림빵을 엄마는 왜 안 먹느냐고 묻는 다섯 살 아이의 표정처럼 무람없이 순수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통화를 중단하고 두 손으로 전단과 비누를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
“네. 예수 믿으러 교회 나오세요.”
“네….”
나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을 받아들기 위해 가던 길을 멈추고, 하던 통화를 멈추고, 마음에도 없는 사과와 감사 인사를 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그녀를 하나님은 긍휼히 구원하실까.
집사라는 직분이 주어지고부터 책무도 따라왔다. ‘목장’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된 교회 소모임에서 ‘목자’라 명명된 모임의 장이 올리는 공지에 ‘네’, ‘아니오’로 대답만 달던 수동적인 성도로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속한 목장의 목자인 권사님은 내가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 복음 사역을 감당하기를 바라셨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도 없는 내가 전도라니 내 준거 기준으로는 거절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권사님…, 저는 그분을 잘 알지도 못하고 또 저랑은 나이대도 차이가 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죄송하지만 저는 못할 것 같아요.”
“할 수 있어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고요. 이번 ‘전도 대잔치’를 위해서 한 명씩 섬겨야 해요. 이제 집사니까 맡아야만 하는 사역이에요.”
믿음이 없는 자가 전하는 복음이라니 이율배반이다. 집사만 해도 그렇다. 신앙이 세워지지 않았고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정중히 말씀드렸었다. 거절은 순순히 거절당했다. 돌아오는 답은 일단 집사 직분을 받으면 믿음도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믿음’이라는 것 없이 직분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모순이었다. 그럼에도 거절을 거절당한 의사를 다시 되돌려 보내지 못했다. 바짝 붙은 뒤차 때문에 내 속도를 지키지 못했다. 상대의 속도위반에 딱지를 떼지 못한 것이다.
전도 대잔치에 그분을 모시기 위해 나는 한 달의 시간 동안 틈틈이 안부 문자를 보내고 만날 약속을 정해 차를 마시고 밥을 먹어야 했다. 7~8년 전에 두어 번 본 사이로 이름도 얼굴도 언뜻 기억나지 않는 분을 교회에 나오라고 설득한다는 것은 신실하지 못한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숙제는 이자처럼 불었다. 전도 대잔치를 일주일 남기고 전도 대상자에게 전할 선물이 빚처럼 떠넘겨졌다. 서랍장 위에 놓아둔 전도 대상자용 선물은 탁상시계처럼 일 초마다 소리를 냈다. 숙제를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저 예전에 모임에서 뵀던 ○○○입니다. 혹시 기억하시나요?’
‘네, 그럼요. 기억해요. 잘 지내죠?’
‘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저는 잘 지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교회에서 선물이 나와서요. 제가 전해드려야 하는데 동, 호수 알려주시면 문 앞에 걸어둘게요.’
‘괜찮아요. 그냥 가지세요.’
‘제 것이 아니라서요. 부담 갖지 말고 받으셔도 돼요.’
‘그럼 고맙게 받을게요.’
‘네. 그럼 시간 되실 때 교회에 나오세요~.’
네 통의 문자로 숙제의 절반을 해치웠다. 전도 대상자용 선물은 꿀이라고 했다. 중년의 어른들은 대체로 꿀을 좋아하시니까 불필요한 선물도 아니라고 마음대로 생각했다. 늦은 만큼 속도를 내서 연락한 것으로 원금은 갚았고, 선물 전달로 이자까지 갚으면 채무는 끝이었다.
다음 날 아침 운동을 마치고 집을 나섰다. 아이의 하교 시간까지 2시간이 남았다. 그분의 집은 나와 같은 아파트의 다른 동이다. 끝과 끝의 거리였지만 10분이면 충분하다. 숙제를 끝내고 좋아하는 동네 카페에 가서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며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1시간 30분 정도 남는다. 모처럼 내 속도대로 좋은 것만 할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빈틈없는 계획은 그분이 사는 동 앞에서 부서졌다. 요즘 우리 아파트는 경비실에서 로비의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볼일이 있는 세대를 직접 호출해야만 한다. 다른 동의 현관 비밀번호를 알 리 없는 나는 난감했다. 세대를 호출하려면 그분께 또 연락을 해야 하고, 얼굴을 보고 인사하는 품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경비실을 호출했다.
“입주민인데요. 이 동에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열어주시면 안 될까요?”
“세대에 직접 호출하세요. 여기선 안 열어줍니다. 이게 원칙입니다.”
“아, 알고 있는데요. 저는 9동 입주민인데 여기 사는 분께 드릴 게 있는데 안 계셔서요. 현관문에 걸어놓기만 하면 되는 거라서요. 그럼 이럴 때는 어떻게…”
“사람도 없는 집에 뭐 하러 가요?!”
얼굴이 홧홧했다. 다른 경우의 수는 입력되지 않은 기계처럼 원칙의 잣대를 들이대는 경비원의 화에 나는 순식간에 사이비 포교 활동가 또는 다단계 옥 장판 판매원이 된 것 같았다. 허리를 구부린 채 스피커에 입과 귀를 바짝 갖다 댄 얼굴이 불콰해졌다. “저도 이 아파트 입주민이라니까요! 그럼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요?!” 새된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스스로도 놀라 인중에 땀방울이 오소소 샘솟았다. 거절을 거절하는 권사님과 거절을 거절하는 수제 비누를 든 중년 여성과 다름없었다.
마음이 동하지 않는 일은 탈이 나고 만다. 괜한 품을 들인다는 모난 마음이 덧씌워져 부대낀다. 세계는 서로에게 무람없다. 난데없이 꿀을 받아야 하는 그분에게 나는 무람없었다. 원칙을 지켰을 뿐인 경비원에게 나는 무람없었다. 나의 거절을 거절당하고 타인의 거절을 거절했다. 나의 속도를 침범당하는 것을 경계하면서 타인의 속도에 해를 끼친 것이다. 속도위반 딱지를 내게 끊어야 할 순간이 모순처럼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