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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반짝 Jul 18. 2022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참새 방앗간을 잃었다. 자주 가던 동네 카페가 리모델링을 한 것이다. 혼자 앉아 책 읽기에 아늑한 맛이 있어 좋아하는 곳이었다. 새로 들여온 넓은 소파와 낮은 테이블의 듬성듬성한 배치는 요즘 트렌드에 맞게 감각적이었지만, 혼자 앉아 책 읽는 손님의 몸과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테이블에 잔을 둘 때마다 할미꽃처럼 허리가 꼬부라진다. 이 너른 자리를 혼자 차지하고 있어도 되나 숙연한 마음에 한 번 더 어깨가 움츠러든다. 이리저리 몸을 꼬며 책장을 넘기는데 카페 한쪽을 독차지한 스피커에서 캐럴이 흘러나왔다. Last Christmas, I gave you my heart­­_ 11월에 크리스마스 캐럴이라니. 남들은 벌써부터 연말을 준비하는 건가 싶어 놀라웠다.


봄 못지않게 연말이 주는 묘한 분위기가 있다. 정리하기. 무엇이든 정리를 하게 한다. 한 해를 돌이켜보며 마음을 정리하고, 주변을 정리하고, 집을 뒤엎기도 하다가 종국에는 다음 한 해를 어떻게 보낼지 계획하고 또 정리한다. 정리를 강요하는 기묘한 분위기가 특별할 게 없는 연말의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내도록 미묘하게 조장한다. 때이른 캐럴이 상기시킨 오묘한 분위기에 떠밀려 영사기를 돌리듯 한 해의 필름을 돌리고 있을 때 아이들이 찾아왔다. 수런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가 활짝 열렸다.

“누나는 크리스마스 선물 어떤 거 말할 거야?”

“올해는 엄마, 아빠 말 잘 안 들어서 못 받을 거 같은데.”

“작년에도 앞으로 착한 일 한다고 기도하니까 주셨잖아.” 양심을 껴안은 채 자못 진지하게 의논하는 모습이 퍽 사랑스럽다.

“레고 공주의 집 갖고 싶은데 엄마, 아빠는 안 된대. 산타 할아버지는 주시겠지?” 그 순간 아이들이 사랑스럽게 여겨지던 마음에 ‘펑’하고 연기가 났다. 사실은 엄마, 아빠가 산타 할아버지이고 선물은 엄마, 아빠가 준비하는 거니까 15만 원짜리 공주의 집은 절대 안 된다고 외치고 싶었다. 동심을 지켜주고 싶었던 견고한 마음은 15만 원 앞에서 봄날의 눈처럼 녹아내린다.

“산타 할아버지는 많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셔야 하는데 너무 비싼 건 곤란하시지 않을까?” 선물을 바꾸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목소리 끝에 숨긴 채 지질하게 한 마디 덧붙인다. 그다음은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벌새처럼 눈을 깜박이는 것을 멈추지 않고 아이의 동태를 살핀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돕는다더니 아이는 보다 저렴한 장난감을 말한다. 그제야 서늘했던 간담에 온기가 돈다.


 산타가 허구임을 깨닫는 것은 몇 살 때일까? 기억이 나는 한 나는 처음부터 알았던 것 같다. 진짜 산타가 있다면 양말에 천 원짜리 한 장이 들어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꾸깃꾸깃 제멋대로 접힌 천 원은 창문 밖에 유리되어 성냥불을 켜던 성냥팔이 소녀의 낙망 같았다. 그래서일까.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무구한 마음을 깨트리고 싶지 않다. 산타 할아버지가 오시는 시간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한 해만 더, 한 해만 더 연장하고 싶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머리맡에 몰래 선물을 두고 나오는 일이 점점 어려운 미션이 되어간다. 잠귀가 밝아진 탓에 방문을 여는 순간 움찔하게 된 것이다. 뒷걸음질로 문을 닫고 나와 아이들이 깊이 잠들기를 검은 밤이 하얗게 될 때까지 시간을 덮어쓴 채 기다렸다. 머리맡에 선물을 살포시 놓아두고, 아이들이 산타 할아버지께 쓴 편지는 책장 깊숙이 숨겼다. 아이들이 답례로 준비한 간식거리는 남편이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숨가쁘게 미션을 클리어한 그와 나는 소파에 기대앉아 한숨을 돌렸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제 속도를 찾아갈 때 즈음 내가 말했다.

“여보,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이야. 이제 내 차례야. 나한테도 선물 줘.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이잖아.” 남편의 눈이 회한에 잠긴다.

 연말이 주는 기묘한 분위기를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도 누구보다 부응하려는 게 나라는 사람이다. 특별한 날 결혼하면 평생 특별할 줄 알고 고르고 골라 크리스마스에 결혼식을 올렸다. 겨울 한파와 크리스마스 특수를 고스란히 맞아 신혼여행은 춥고, 평소보다 1.5배 높은 비용이 들었다. 우리의 기념일은 남들에게도 특별한 날이어서 외식 한 번을 하기에도 제법 큰 힘이 들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으려고 아기띠에 아이를 동여매고 식당 앞에 세워진 관광버스에서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린 적도 있었다. 고난 끝에 얻은 한 끼 식사는 사진 한 장의 이미지로만 남았다. 그날의 맛과 멋은 기억 속 어디에도 부유하지 않는다. 관광버스 안을 메운 쿰쿰한 냄새와 울렁거리는 히터의 열기만 남았다. 그날의 사진 속 반짝이는 오너먼트들은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불 속에서 보았던 크리스마스 풍경 같다. 무리하게 꾸민 추억은 성냥불이 꺼지면 사라지는 환상이다.


 그럼에도 12월은 애틋하다. 열한 장의 달들이 모두 저쪽으로 넘어가고 한 장만이 홀로 남아 이쪽을 지키는 데 대한 애틋함이다. 남은 한 장이 저쪽으로 쉬이 넘어가지 못하게 한 해의 미련을 친친 감아 붙잡아 두고 싶다. 애틋해서 특별하게 꾸며주고 싶다. 설레는 마음에 쉬이 잠이 오지 않아 울음이 터진 아이를, 한 시간마다 깨서 선물의 유무를 확인하고 기어이 새벽 불을 켜는 아이를, 그 순일함을 오래도록 지켜주고 싶다. 꼬깃꼬깃 접힌 채 양말 속에서 발견되길 기다리던 천 원에도 그 시절 부모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구겨진 천 원은 시시했지만 한동안 서랍 속 보물상자 안에 고이 담아둘 만큼 소중했다. Last Christmas, I gave you my heart. 크리스마스에 부모는 나에게 마음을 주었다. 산타 할아버지를 치켜세우는 아이들에게 생색내고 싶은 쩨쩨한 마음이 고개를 내밀기도 하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을 보낸다. 내년에도 크리스마스에는 사랑이 지속되기를 무구하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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