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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반짝 Jul 15. 2022

인생의 회전목마

아침 일곱 시, 알람이 울렸다. 전날 밤 우리들의 약속을 일깨워주는 모닝콜. 떠지지 않는 눈 위로 흐르는 모닝콜의 멜로디는 쌉싸름한 맛이 난다. 한 이불에 엉겨붙은 가족들은 벨 소리를 외면한다. 일출을 보자던 약속은 이대로 깨지는 것인가. 잠은 깨지 않고 약속은 깨지는 아침. 평소라면 그대로 다시 잠들었겠지만 여행이라는 일상의 반대말은 달리 행동하게 한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침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었다. 생경한 잠자리에 뭉친 어깨를 주무르며 발코니에 다가섰다. 추울까? 살짝 열어본 창문으로 냉기가 기다렸다는 듯 들어선다.


한기에 놀란 발가락이 곱아든다. 폭닥한 이불이 발가락을 데워주겠노라 손짓한다. 또다시 망설임. 시계를 보니 벌써 7시 10분이다. 이곳의 일출 예정 시각은 7시 19분. 해변으로 통하는 산책로의 입구와 먼 방이라 서둘러야 한다. 심미성이 주기능인 코트 대신 남편의 롱패딩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간밤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패딩에 달린 모자로 덮어씌우니 침낭이 걸어가는 듯하다. 이른 아침, 여행지의 바닷가. 우스운 꼴이 용인될 시간과 장소다.


부츠에 맨발을 욱여넣었다. 어제도 놓쳤으니 오늘밖에 기회가 없다. 집이었다면 생각조차 하지 않을 일출. 동해에 왔으니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아야 여행이라는 일상의 탈출을 그림 좋게 완성할 것 같은 무의미한 신념이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미로 같은 복도를 굽이돌아 산책로 입구에 다다르니 벌써 날이 훤하다. 바닷가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을 때마다 무릎이 찧인다. 모래밭에 발을 담그고 수평선 너머로 눈을 맞췄다. 구름은 붉어지는데 벌겋고 둥근 것은 보이지 않는다. 구름떼가 해를 가렸다.


발갛게 둥근 것은 대신 코에 걸렸다. 딸기코를 손등으로 토닥이고 주머니 속 핸드폰을 찾았다. 실패라도 기념사진은 남겨야 하니까. 핸드폰과 함께 남편의 비상금 카드가 달려 올라왔다. ‘이것 봐라? 또 챙겨 왔잖아?’ 빨간 코가 씰룩인다. 여행지에서 남편은 인심이 후하다. 남편의 비상금으로 기념품을 사주는 것이 우리 가족의 여행 행사이다. 일출을 보는 것은 실패했지만 남편의 마음을 엿보는 것은 성공했다. 오르골이 하나 더 생길 예정이다. 새벽을 품은 아침 공기가 상쾌하다.


회전목마와 대관람차 중에 어떤 오르골을 고를지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문 앞에서 카드키를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핸드폰과 카드키는 나오는데 남편의 비상금 카드가 나오지 않는다. 주머니 끝까지 손을 밀어 넣어도 잡히는 게 없다. 벌겋게 둥근 것은 이제 얼굴 전체에 걸렸다. 바닥을 살피며 미로 같은 길을 되돌아갔다. 패딩은 점점 덩치를 불리고 미로는 무한히 증식했다. 맨발의 새끼발가락이 부츠 속에서 고군분투했지만 ‘모래밭에서 카드 찾기’ 전쟁에서 패했다. 평화로이 자는 남편을 깨워 패전을 알렸다. 겨울철 동해에 자주 발생한다는 너울성 파도가 남편의 눈에서 휘몰아친다. 그길로 롱패딩을 낚아챈 남편은 패망의 길을 되짚었다. 카드는 모래 알갱이들의 포로가 되었다.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꿈꾼 자에게 찾아온 완벽한 일탈이다.


리조트의 분실물 센터를 찾아 또 한 번 낙망을 맛보았다. 반복된 절망은 오히려 잠자던 무구함을 깨웠다. 어쩔 수 없다. 밥이나 먹자. 리조트 근처 전복뚝배기 식당에 갔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전복이 펄펄 끓는 육수에 들어가자 금세 잠잠해졌다. 아침나절 내내 벌렁거리던 마음도 뜨끈한 육수에 적셔져 노곤했다. ‘못 찾아도 나쁠 거 없잖아.’ 풍랑이 한풀 꺾였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했다. 불완전한 희망을 품지 않은 발걸음은 가벼웠다.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른 분실물 센터, 남편의 비상금 카드가 우리를 맞이했다.


오르락내리락. 우리는 인생의 회전목마를 탔다. 오르락내리락 같은 곳을 돌고 돈다. 오르락내리락 돌고 도는 일상을 따라 원을 그리면 완전한 원형일까? 반복되는 일상을 따라 점선을 그으면 완전한 실선일까? 아마도 나선형과 간격이 들쭉날쭉한 파선일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이 일탈이다. 매일이 여행이다. 매일 풍랑을 만난다. 풍랑은 무너진 파도일 때도 너울성 파도일 때도 있다. 그러니 애써 다른 일탈을 꿈꿀 필요는 없다. 매일을 여행처럼 즐거움에 집중해서 살면 될 뿐이다. 그러다 풍랑을 만났을 때 서핑하듯 파도를 즐기지 못 하겠다면, 대관람차를 타고 세상을 구경하는 것처럼 한발짝 빠져나와 관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자칫 파도에 잘못 휩쓸려 심해로 가라앉을 수도 있으니까.


리조트의 기념품 가게 안, 오르골 진열대 앞에 머리를 맞대고 나란히 선 우리 가족. 내가 고른 것은 회전목마일까, 대관람차일까. 상상에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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