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중, 기록.
‘음악의 미켈란젤로’
"바흐는 근본적으로 건축가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아프리카 가봉의 랑바레네에 정착한 알자스로렌 출신의 알버트 슈바이처는 페달 피아노로 바흐의 전주곡을 연주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지도자, 오르간 연주자, 의사 겸 선교사였던 슈바이처는 병원의 재정 충당을 위해 순회공연을 다니며 바흐를 연주했다. 성스러운 음악으로 아프리카를 물들인 것이다. 그의 인도주의적인 행동과 오르간 연주자로서의 재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1905년에 출간한 「음악가이자 시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제목처럼 슈바이처는 음악가이자 시인이었다. 그는 이 책에서 '음악의 미켈란젤로'가 가진 건축학적이고 상징적인 힘에 최초로 주목했다.
바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다시 한 번 부흥기를 맞았다. 전쟁기간 동안 독일은 바흐의 음악을 병영의 스피커를 통해 틀어놓거나 포로들로 이루어진 관현악단에게 연주하게 했기 때문이다. 철학자이자 음악이론가였던 블라디미르 얀켈레비치는 "바흐가 지겨워졌다고 감 히 말하고 싶다"는 글을 남겼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전쟁이 끝나고 IP 판이 개발되면서 바흐의 인기가 더욱더 높아졌을 텐데 말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도 잘 알고 있다. 1930년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이 최초로 녹음됐고, 1950년대에는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가 바로크 음악 열풍을 일으켰다. 구스타브 레온하르트가 바흐의 음악을 하프시코드로 연주하면서 주목받았고, 무너진 베를린 장벽 앞에서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가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을 연주해 바흐의 음악은 정치적인 의미까지 부여받게 됐다. 우리가 잘 모르는 이야기도 있다. 아놀드 쇤베르크. 암반 베르크, 존 케이지는 12음 기법과 푸가 연주를 통해 바흐의 음악적 자산을 계승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스티브 라이히, 필립 글래스와 같은 미니멀리즘 음악가들이 등장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악곡 푸가의 각 부분을 말하는 사람에 비유했다. 지금도 우주탐사선 보이저 1호와 2호는 성간 우주에서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보이저 호에는 골든 디스크가 실려 있다. 우주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르는 외계 생명체를 위해 지구를 대표하는 소리, 언어, 음악을 담아 놓은 이 앨범에는 바흐의 <파르티타 3번>도 수록돼 있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 vol.3 뮤직, 사랑과 저항사이
3부 음계의 안과 밖
‘포로 수용소에서 우주까지…바흐의 사용법’ 중 일부.
글: 아가트 멜리낭 Agathe Melin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