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 피츠제럴드, Misty
10월의 토요일 저녁이었다. 뜨거운 열기는 사라졌고, 기분 좋은 바람이 살랑이던 날이었다. 선선해진 날씨에 친구와 바다 근처에 있는 공원을 산책했다. 공원에는 우리처럼 가을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차분해진 공기만큼 고요한 저녁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언덕 위로 올라갔다. 곧 해가 지기 시작할 터였다. 쾌청한 날씨에는 지는 해를 뚜렷이 볼 수 있기에 함께 간 친구와 ‘오늘, 우리가 운이 좋네’라고 이야기했다. 노을빛이 어렴풋하게 공원에 있는 모두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작은 호수와 그 너머의 억새가 가득한 들판은 은빛에서 황금빛으로 물들어갔다.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푸르고도 연하게 보랏빛을 띠어가는 하늘 위에는 구름마저 가볍게 흘러가고 있었다. 마치 안개에 휩싸인 듯 노을빛이 공원에 내려앉은 느낌이었다.
A fine mist, the etherealized essence of the fog, hung visibly in the wide and rather empty space of the drawing–room, all silver where the candles were grouped on the tea-table, and ruddy again in the firelight.
응접실의 넓고 텅 비어있는 공간에는 짙었던 안개가 살짝 개어 드리워져 있었고, 티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들은 은빛으로 빛나다가 난로 불빛에 비쳐 다시 붉어졌다.
버지니아 울프, <밤과 낮 Night and Day> 중에서.
소설의 어떤 분위기를 설명하는 데 있어 날씨는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다음 내용에는 살짝 갠 안개 덕택에 나이 든 사람들의 얼굴도 부드럽게 어루만지듯이 화사하게 보이게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장면에서 안개는 파티에서 서로 어울리며 담소를 나누는 앞으로의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영어를 접할 때마다 노래 제목을 떠올리는 게 가장 쉬운 나로서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Misty’가 떠올랐다. 엘라 피츠제럴드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세상 근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엘라의 유명한 곡들도 스윙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경쾌한 곡이 많다. 노래하는 영상을 봐도 그녀가 얼마나 밝은 사람인지가 느껴진다. 흑인 여가수로 노래하면서 삶의 에너지를 긍정으로 바꾸는 사람이자 목소리조차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곡에서 안개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여기에서 안개는 사랑에 빠진 사람의 시야를 말한다. 화자는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 있다.
Look at me, I’m as helpless as a kitten up a tree;
And I feel like I’m clinging’ to a cloud,
I can’t understand I get misty,
just holding your hand.
저를 봐요, 전 나무 위의 아무 힘없는 아기 고양이 같네요,
마치 구름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왜 안갯속에 빠져드는지 알 수 없어요.
단지 당신과 손을 잡고 있을 뿐인데.
직설적인 가사들이 많은 요즘에는 이런 가사가 오글거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사에 공감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필하는 가사가 아니라 정말 진심이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대문자 F인 나도 당연히 공감이 가다 못해, 내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긴 나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생각할 만큼 과몰입을 하고 공감을 많이 하는 편이긴 하다. 이런 감수성 풍부한 나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긴 하지만, 그게 장점이 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카페에서 소설책을 읽는데 갑자기 눈물이 난다든지, 영화관에서 혼자만 꺼이꺼이 운다든지 할 때는 정말이지 피곤하고 창피하다. 어쩔 때는 T인 사람들이 부럽다. 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나를 모두 편안하게 생각한다는 게 장점이 된다. 공감을 잘하니까, 이런저런 속내를 잘 터놓는 것 같다.
사랑에 한창 빠져있을 때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 누가 뭐라 하든 그 사람 밖에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 그런 점에서 안갯속에 빠져든다는 표현이 참 와닿았다. 꼭 맑은 날씨만 좋은 것은 아니다. 안갯속에 빠져 허우적 대더라도 손을 잡아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일은 꽤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