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야 예쁘나 들어와서 밥 먹어라!
할머니는 두둑한 뱃심에 힘을 꽉 주며 빌라 전체가 떠나가도록 손녀들을 불렀다. 할머니의 부름은 오늘 하루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와 같았다.
지독하게 놀 줄 만 알았던 두 자매는 온 동네를 홍길동 마냥 동해 번쩍 서해 번쩍 들쑤시고 다녔고 그 시절 내 기억에도 언니와 함께 발맞춰 뛰어다니던 모습만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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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과를 다시 곱씹어 보면 잠도 없었는지 가족들이 한참 자고 있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어린이들의 대통령 "뽀로로"로 하루를 시작했다. 네모난 바보상자는 어찌나 재밌는지 밖에 나가서 노는 것 이외에는 티브이만 볼 만큼 참 좋아했다.
뭐에 씨인 것처럼 현혹되었다고 해야 하나. 시도 때도 없이 전환되는 형형색색의 화면에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어버렸으니, 티브이와 지독한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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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한 시라도 떨어져 있는 걸 싫어했다. 오죽하면 유치원을 일 년 꿇었을까.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도 한몫했지만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을 대신에 기댈 수 있는 건 할머니뿐이었다. 불안함이 많은 나로서 유일한 진정제이기도 했다.
욕심 많은 연년생 두 자매는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컷이 암컷에게 구애를 하듯 매달렸고 그날 밤도 어김없이 "제41회 할머니 차지하기 대전"이 발발했다. (41패 0승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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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둔하고 손이 많이 가던 언니는 툭하면 아빠에게 혼이 났다. 덕분에 나는 눈치 100단이 되어 미꾸라지처럼 교묘하게 이리저리 빠져나가 아빠의 꾸지람을 피했지만 할머니만큼은 온전하게 차지할 수 없었다. 꼴랑 한 살밖에 차이 나지 않은 언니는 항상 나보다 우선이었다.
욕심 많고 힘센 언니에게 까불어 된 통 당해 보고 나니 일 년 치 짬밥은 이등병인 내가 일등병을 감히 넘볼 수 없었다. 어김없이 그 날밤도 할머니는 언니를 감싸 안아 먼저 재우셨고 언니가 잠이 들면 살며시 내 쪽으로 등을 돌려 팔베개를 해주셨다.
언니가 할머니를 독차지했다고 싱글벙글 웃고 있을 때 할머니와 발가락으로 서로 주고받은 시그널은 지금 생각해도 간질간질하고 스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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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다리에 상처가 하나씩 늘었다. 엄마는 늘 내 다리를 보곤 속상해하셨는데 사내아이보다 오히려 더 사내 같은 딸이었다.
깡마르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밖이나 집이나 늘 뛰어다녔고 여기저기에서 넘어지고 쓸리고 멍들다 보니 상처는 늘 달고 살았다. 학교에서도 여자애들과 이야기하고 놀았던 기억보다는 남자애들과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구름사다리로 대결하며 치고받고 싸워 선생님께 회초리를 맞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도 책가방을 휙 내려놓고 바로 뛰어가 놀았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때 체력은 건전지 광고의 에너자이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계단 3층만 올라가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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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뒤편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큰 탄천이 하나 있었다. 탄천에서 봄에는 꽃구경, 여름에는 물놀이, 가을에는 단풍 구경, 겨울에는 쥐불놀이 등 이외에도 나에겐 더 없는 놀이터였지만 언니도 그러하듯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할머니가 나를 등에 업고 언니 손을 잡으며 "시냇물"을 부르던 순간이 아닐까 싶다.
할머니의 손은 리듬을 타듯 내 엉덩이를 톡톡 치며 맑고 고운 목소리로 잔잔하게 노래를 불렀다.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강물 따라가고 싶어 강으로 간다." 서서히 지는 주황색 노을빛이 강물에 반사돼 눈을 잘 뜰 수 없었지만 그 빛이 할머니의 온몸을 감싸 내 등도 절로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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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는 영 소질이 없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글 짓기나 시, 독후감, 독서퀴즈 등 글에 관한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늘 끊임없는 생각과 고민하는 성격이 글을 쓰는 데 있어서 한몫 차지하지만 고향에서 자유롭게 원 없이 뛰놀았던 경험과 할머니의 넘치는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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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고향에서 살던 때라고 얘기할 것이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서슴없이 고향에서 살던 때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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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기억 속 깊이 우거진 곳에 다녀왔다. 좋지 않은 기억력을 되새김질하느라 과거의 톱니바퀴를 오랜만에 굴렸더니 머리에서 김이 폴폴 난다. 현실로 되돌아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타임머신은 연신 알람을 울린다.
"나 그냥 여기서 살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