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글을 쓰는 일이 전혀 없었다. 글을 읽는 행위마저도. 일명 ‘취업준비생’과 ‘백수’의 타이틀을 너무나도 인식한 탓일까. 괜히, 부모님께 죄인이 된 것 같아,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허투루 보낼 수 없었고 그렇게 하지 말라던 남들과 나 자신을 비교하며 몸을 혹사시켰다.
-
아빠가 20대 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고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30대는 더더욱 그렇고, 그러다 눈 떠보니 지금의 나이가 됐다고. 정작 10대 때는 학생이라는 지독한 시간에 갇혀, 자유로이 날아오를 ‘스무 살’의 나만을 기다렸는데 막상, 앞자리가 ‘2’로 바뀌어보니, 어른이라는 환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심지어 ‘2’로 바뀐 순간, 이루어낸 거 하나 없이 하루가 눈 감았다 뜨면 1년이 지나가버린 듯 시간이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짧은 나의 다리로 그를 쫓아가다 보니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요즘이다.
-
21살 때부터 빼곡히 적어왔던, 조금은 빛바래진 은색깔의 노트에 올해 초, 이루고 싶은 굵직한 목표들을 하나둘씩 번호를 매겨 간직했다. 그 번호의 끝은 숫자 ‘8’이었고, 이제 단 ’2개‘ 밖에 남지 않았다.
동그라미가 뭐라고. ’성취감‘에 목말라 있었던 나는 수백 킬로 떨어져 있는 달콤한 오아시스를 맛보고자 쉬지 않고 달려왔고, 달리는 중이다. 결국, 숨은 턱 끝까지 차올라 저 멀리 오아시스가 보이는 것 같지만 현실은 한참이나 멀었다. 그러니, 오늘은 이 글을 쓰면서 나무 밑에 조금 앉아있다 가기로 나 자신과 타협을 보았다.
-
최근,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 깊게 공부하고 있다.
평생 업으로 삼고 싶을 정도의 간절함이 정녕 환상일지. 그렇다면 그 환상이 깨짐에도 불구하고 원하고 또 원할지. 시험해 보는 중이다. 특히나, 내가 선택한 이 세계는 남들에게 인정받기 힘든 직업인 것 같다. 남들에게 이 직업을 언급한 순간, 모두들 입을 모아 ‘왜 굳이 돈도 안 되는 일을 하려고 하냐.’, ‘곧 없어질 직업이다.’가 인사법이 되어버린다. 비록, 작년까지만 해도 수많은 타격에 내성이 출중해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던 나였는데, 지금은 환상에 옅은 금이 갔는지 자꾸만 웅크려지는 나다. 배우는 행위 자체에 내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만큼 노력하고 있지만 왜 가족들 앞에서는 왜 그렇게 날카로워지는 걸까. 인정받지 못할 나의 큰 두려움이 방어기제를 만들어낸다.
-
치열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언니에게 연락이 왔다. 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편안하게 먹고 놀고 하는 내 모습을 보고 ‘개 부러운 생활’이라며. 타국에 있는 언니라 SNS의 단편적인 부분만을 보았으니, 당연히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메시지를 받은 나는 잠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벌게졌다가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언니의 말에 반박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기에 대화창을 보고 그냥 나와버렸다.
-
부모님께 모든 걸 의지하고 있는 현재가 편안하고 좋아 계속 이렇게 살고 싶다가도, 어서 빨리 독립해야 한다는 성급한 마음이 나를 밀어붙인다. 마치 천사와 악마가 머릿속을 어지럽히듯, 이 둘의 의견이 하루에도 몇 번씩 충돌한다. 그래서 유난히도 뜨겁고 더운 올여름,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몇 번이고 닦아내며 바쁘게 살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업이 되어 살아갈 수 있기 바라면서.
-
일주일 내 먹먹한 구름과 축축한 비는 내 기분까지 습하고 찝찝하게 만들어버렸다. 무슨 일인지, 아침 눈을 떠보니 오랜만에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너무 반가워 창문을 활짝 열었다. 하늘에 구름과 함께 떠오른 태양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생각이 많을 땐 쓰기’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마음도 복잡하겠다. 이때다 싶어 얼른 키보드에 띵동 노크를 해버렸다.
-
그동안 억눌러왔던 행위가 풀려버리고, 쏟아내고 싶은 말이 넘쳐나다 보니 뒤죽박죽 가독성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앉아서 쓸 수 있는 행위에 참 감사하다. 어디에서도 털어놓지 못할 이 얘기를, 또 말솜씨가 없는 나에게 글이 가져다주는 힘은 다시금 나를 살아가게 만든다.
-
동그라미 하나를 완성했으니, 또 다른 동그라미를 채우기 위해 내일도 분명 달리겠지. 그래도 쉬지 않고 달리면 수분이 부족해 금방 쓰러지고 말 것이다. 오아시스를 맛보지 못하고 코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니, 환상적인 오아시스를 목구멍 속으로 흘려보내는 순간이 오길 염원하면서 난 오늘 쉬었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