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는 여느 집 모녀관계처럼 다정하고 친밀하지는 않은 사이였다. 그건 아주 어린시절부터 그러했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늘 일을 했기 때문에 집은 어둑해 질 무렵까지 비어 있는 날이 많았고 어렸던 나는 텅 빈 집이 무서워 온 방에 불을 켜 두고는 현관문과 대문을 훤하게 열어 둔 채 언제 올지 모르는 엄마를 목을 빼고 기다리곤 했다. 혼자 텅 빈 집에 나만 홀로 남겨둔 엄마가 미워 속으로는 원망도 많이 했는데 타고난 천성이 부끄럼이 많은데다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는 둔한 타입이었던 나는 그런 솔직한 속내를 엄마에게 들어낸 적이 없었다.
뭐, 엄마 바라기 꼬마였던 나는 시간의 축복 속에 쑥쑥 자라 어느 순간에는 친구 바라기가 되었다가 또 남편 바라기가 되었고, 이제는 좀 시간이 더디 흘렀으면 싶은 마흔이라는 나이가 되어 아이들 바라기로 살고 있으니 우리 사이가 가까워질 계기는 그리 많지 않았다고 봐야 맞겠다. 각자 열심히 사느라 바빴으니까.
그래도 막내가 만 3살이 넘어 서면서부터는 좀 편해 지긴 했던 모양인지 부지런히 회사를 다니면서도 주말이면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캠핑도 다니고 여행도 다니며 사서 고생을 즐겼다. 그 덕분에 가끔 부모님을 모시고 좋았던 곳으로는 한 번 더 여행을 하기도 하며 그제서야 조금씩 우리 사이의 간극이 좁혀져 가고 있는 걸까 싶었는데 그 행복했던 시간은 길지 못했다. 어느 햇살 좋던 가을날 엄마가 쓰러지셨기 때문이다. 이후 엄마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살아는 계시지만 스스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와상환자. 병원이 아니면 생명을 부지하기 위태로운 노인이 되어 버리셨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가며 엄마의 건강 염려증이 극도로 심화되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지만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엄마가 가끔 근무시간에 전화를 걸어 화장품이나 건강식품 같은 것을 인터넷으로 대량으로 구매하면 얼마나 되냐며 물었으나, ‘‘퇴근 하고 통화해’’라며 매몰차게 끊었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가깝지 않은 거리기에 자주 와보지도 못하면서 어쩌다 한 번 엄마 집에 오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꼼짝 앉고 누워 차려주는 밥만 먹다 하루 종일 엄마가 고생해서 만들어 준 반찬통만 싸들고 다시 우리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엄마의 건강 염려증에 좀 더 귀 기울일 걸 그랬다.
엄마의 전화를 조금 더 다정하게 받을 걸 그랬다.
엄마가 음식을 할 때 옆에서 조잘조잘 수다도 떨고 손도 보태어 볼 걸 그랬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내 가슴이 사무치도록 후회되는 순간은 스마트폰 사용법을 물어보는 엄마가 너무 귀찮아 빠르게 한 번 알려드리고는 슬쩍 자리를 피해버렸던 시간들이다. 분명 함께 여행을 다니고 일주일에 서너 번 이상은 짧아도 전화통화를 했는데 왜 예전 엄마의 모습이 엄마의 목소리가 잘 떠오르지 않는 걸까.
말도 할 수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엄마. 그런 엄마를 옆에 두고도 엄마가 너무 보고싶어 불 꺼진 보호자 침상에 누워 예전 엄마의 모습을 떠올려 보려 엄마의 스마트폰 사진첩을 열어보던 그 순간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그 사진첩 속에는 내 모습 밖에 없었으니까.
엄마의 스마트폰 속 사진첩에는 내가 카톡으로 보내 준 사진이 아니라 내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를 직접 찍은 사진이 대부분 이었다. 출장 때문에 아이들을 봐주려고 엄마가 우리집에 올라와 계셨을 적에 찍은 사진 같았다. 여행도 많이 다니셨으면서 스마트폰으로 본인 사진 좀 많이 찍어 두시지, 왜 다 내 사진이란 말인가. 속이 너무 상하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 참으려고 해도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분명 카카오톡으로 받은 사진을 저장하는 법을 알려 드리긴 했는데 설마 그걸 여태 모르셨던 건 아니겠지… 후회가 몰려왔다.
나는 아직도 엄마의 스마트폰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바보 엄마. 바보 박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