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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마님 Jul 12. 2022

엄지 손가락을 들면

안녕 까밀로 EP 2/5

콜롬비아 북부의 여름이 찬란하게 핀 강렬한 꽃이라면 칠레의 남부의 여름은 느리고 소소하게 피는 들꽃 같다. 은퇴 후 이곳에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루가 길고 느긋한 탓이다.



January 12, 2016

쨍 내리쬐는 햇볕은 아침 7시 기상 알람이다. 간밤에 엄청난 돌풍으로 나무집이 요란했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입부처럼, 들판 한복판에 있는 나무집은 부서지거나 가뿐히 날아 옮겨질 테다. 창문틀과 지붕 덮개가 펄럭펄럭 소리를 냈다. 춥기는 또 어찌나 춥던지, 패딩 바지와 패딩 점퍼를 입고도 잔뜩 오그려 덜덜 떨었다.


1층으로 갔더니 까밀로가 이미 일어나 아침을 차리고 있었다. 물을 데워 두었다고 해서 욕실로 가보니 들통에 담아 난로에 데운 물과 찬물이 담긴 들통이 있다. 둘을 잘 섞어 바가지로 샤워한다. 외할머니 집에 온 것 같네, 나는 그때부터 남미에 올 준비를 했던 것일까! 검게 탄 빵 끝을 서걱서걱 긁고 잼을 발라 먹는다.


까밀로가 짜 준 일정에 따라, 말을 타러 아침 일찍 농장에 갔다. 동화책의 삽화처럼 예쁜 농장이다. 들판에 울타리를 쳐 구역을 성글게 나누어 놓았다. 오리, 양, 소들이 각자의 안전망에서 태평하게 풀을 뜯으며 나를 구경한다. 농장주 할아버지가 까밀로를 반기며, 예쁘게 꾸며진 집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레이스 커튼이 달린 부엌 창으로 들판이 보인다. 난로에 차 주전자를 올리더니, 물이 끓는 동안 뒷마당에서 신선한 달걀을 꺼내왔다. 노른자가 볼록하고 탱탱하게 올라온 프라이를 보며 나는 신선하다는 말을 10번쯤 했다.


까밀로는 말의 소유주지만 관리는 이 농장에서 해준다고 한다. 울타리 밖으로 세 마리 말이 모여서 놀고 있다. 셋 다 덩치도 크고 꽤 높다. 나는 동물을 타보는 게 이번이 처음라 긴장했다. 나는 '처음'을 엄청 강조하며, '안전한지' 여러 번 물었다. 아저씨와 까밀로가 과장된 표정으로 안전하다고 나를 안심시키며, 말을 세우고 방향을 바꾸는 법을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어려서부터 말을 좋아했던 까밀로는 몽골인처럼 말을 타고 달린다. 다닥다닥 말발굽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내리막을 달린다. 말이 속도를 낼 때 기분이 좋다며, 속이 다 시원하다고 한다.


말을 타보면 안다. 말이 얼마나 키가 크고 허리가 굵은지, 리드미컬한지. 그는 위아래로 통, 통, 통, 양옆으로 실룩, 실룩, 실룩 리듬을 타고 움직인다.

말에게 속도를 줄이라고 할 때는 쉬쉬쉬 소리를 내면 된다. 처음엔 까밀로가 끈을 잡고 옆에서 걸어주다가, 끈을 직접 잡아보란다. 말과 함께 앞뜰을 통통통 걸어 다니는데, 내가 너무 자주 쉬쉬시쉬 소리를 내며 멈추었더니 말이 드드르릉 앞니를 보이며 귀찮다는 신호를 했다. 말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나도 내가 답답하지만, 나는 종목과 상관없이 모든 배움에 느렸다. 보기에 답답했는지 까밀로가 다시 나섰다. 그가 앞에 타서 조종해주기로 하고 나는 말 엉덩이에 탔다. 뒤에 타보면 안다. 말 엉덩이가 얼마나 높고 굵은지. 아까보다 더 통통통, 더 실룩 실룩실룩. 그래도 혼자 탔을 때보다 마음이 놓여 재미있었다. 허리 뒤춤에 앉아 들판을 거닐다, 까밀로가 꽉 잡으라고 신호를 하더니 언덕 위아래로 걸었다 달렸다 했다. 너무 무서웠지만 말이 놀랄까 소리 지르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악 물었다. 양의 무리가 말의 움직임에 지레 겁을 먹고 이리저리 도망을 다녔다.


까밀로가 말을 달리러 간 사이, 나는 농장 아저씨와 체리를 따왔다. 알이 작은 체리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고 오물거린다. 부엌에서 차를 마시며 농장을 바라보니 마음이 평온하다. 말을 타는 것보다 바라보는 게 나의 취향이구나. 나는 높은 것도 빠른 것도 너무 무섭다.


하지만 까밀로가 돌아오자 긍정적인 후기를 버릇처럼 남겼다.

“말 별거 아니네, 너무 재밌었어!”

까밀로는 내가 말 위에서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토끼눈을 하고 쉬-쉬쉬쉬- 소리를 내며 놀렸다. 아저씨가 과장되게 웃으며 호응했다.  


농장에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조금 쉬고 있으니, 까밀로가 집 근처에 엄청 예쁜 호수가 있다며 보러 가자고 한다. 역시 낮이 긴 파타고니아는 하루가 3일 같다.

버스도 없는 마을에서 호수를 어떻게 가냐고? 차를 타면 된다. 누구 차? 모르는 사람 차! 길에 서서 엄지를 척 들고 있으면 차가 선다. 여기서는 히치하이킹을 아데도(a dedo, 손가락으로)라고 부른다. 엄지 손가락을 한 번 들어 큰 사거리로 나갔다가, 거기서 엄지 손가락을 한 번 더 들어 트럭을 타고 호숫가까지 갔다.


푸른 호수와 숨 막히는 풍경을 보며 한참을 걷는다. 걸으며 공기와 바람을 느낀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노래를 자주 흥얼거렸다.


까밀로가 종알종알 자기 얘기를 한다. 19살까지 프로페셔널 축구팀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는 24살인데, 그가 16살에 여자 친구와 낳은 딸이 8살, 그리고 현재의 아내와 낳은 5살짜리 딸이 있다. 지금의 아내도 결혼 전에 낳은 딸이 있어서 지금은 다섯 식구가 함께 산다. 첫 딸을 임신했을 때, 여자 친구는 딸을 키우고 싶지 않다고 했다. 딸이 태어난 후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까밀로는 부모의 도움을 받으며 딸을 키웠다. 갓난아이를 데리고 울면서 집에 들어온 날, 까밀로의 아버지는 그의 뺨을 때렸다고 했다. (처음엔 이 이야기를 듣고 양아치인 줄 알았는데, 남미에서는 흔한 이야기다) 그는 축구를 그만두고 바로 생업에 뛰어들었다.


산티아고의 부모님 집에 아내와 세 딸을 두고 오는 그의 심정이 오락가락이다. 까밀로와 동갑인 스물네 살의 어린 아내는 까밀로를 졸라 가끔씩 도시로 가서 산다. 딸들을 맡겨두고 어제도 외박을 했다며, 걱정하는 아버지의 전화가 시시때때로 이어졌다. 까밀로는 신나서 놀다가도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까밀로는 어머니와 통화하는 일이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와 훨씬 가까워서, 몇 시간이고 통화하며 시시콜콜 모든 이야기를 전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차를 잡았다. 잠깐 까밀로가 앞서 걷는 사이 빨간 트럭을 보고 손을 척. 내밀었다. 생물학자 두 명이 타고 있었는데 그들이 유럽인들이라 영어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산길에 왠 동양 여자가 혼자 있어 의아한 마음에 세웠단다. 자기네가 가는 길보다 더 돌아가서 집 앞에서 세워주었다. 파타고니아에서는 모두가 모두에게 친절을 베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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