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내내 또 얼음장 같은 바람이 휘몰아쳐서, 밤새 잠을 설쳤다. 겨울용 오리털 침낭이 아니라 가벼운 폴리 소재의 침낭을 가져온 나의 준비성 부족 탓이다. 혼자 텐트로 가면 너무 추울 것 같아서 일단 불이 피워진 공용 주방에서 최대한 늦게까지 버티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텐트로 기어들어갔다.
맑은 첫째 날과 둘째 날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연속으로 며칠 비가 오니 기온이 훅 떨어졌다. 셋째 날에는 그나마 안드레아가 옆에 있어서 체온으로 버틴 모양이다. 마지막 날인 넷째 날 밤은 정말 혹독하게 추웠다. 팔다리를 주무르고 심장 마사지를 하고 백팩을 내 몸 위에 올려두어도 이가 딱딱 떨렸다. 옆 텐트에 혹시 재워줄 수 있는지 가서 물어야 하나, 이대로 혼자 동사하는 건 아닐까, 온갖 걱정이 든다.
도저히 안 되겠다싶어공용 주방에 가보니 난롯불은 이미 꺼져있고,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이곳에 아직 남은 온기가 있어 내 텐트보다 따뜻했다. 누군가 젖은 점퍼를 말리려고 했는지 식탁 위 나무기둥에 점퍼 여러 개가 걸려있었다. 만져보니 제법 말라있어서, 점퍼 두 개를 몰래 들고 텐트로 돌아왔다. 다리에 하나 몸에 하나 추가로 덮었을 뿐인데 이렇게 따뜻할 수가... 오리털은 역시... 엇, 잠깐 눈을 붙였다 뜨니 해가 뜨고 있었다. 다시 점퍼를 걸어두려고 조심스럽게 텐트에서 나와 부엌으로 갔다.
아직 어둑어둑한 새벽이지만 산장 안에 들어가니 이미 두 명이 부스럭거리고 있다. 나는 일단 자연스럽게 점퍼를 원위치에 걸었다. 그들은 불을 피우려고 하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어린 한국 남자들이었다. 둘은 젖은 양말을 말리고 있다.... 아니, 말리려고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문제가 있었다. 불을 피울 줄 모른다는 것… 그리고 텐트 안이 너무 추워 밤새 잠을 설쳤다는 것이다. 우리는 추워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름을 들이붓고 종이를 찢어 넣고 부채질을 반복했다. 우리의 노력과 간절함에도 불은 간신히 종이만 태워낼 뿐 나무에 붙지 않았다.
그렇게 종이와 나무껍질만 태우길 2시간쯤, 동이 트고 아침이 되자 산장으로 다른 여행자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칠레노가 난로를 보더니 의아해하며 묻는다. “왜 불을 안 피우고 있어?” 그는 툭, 탁! 동작 하나로 단숨에 화르륵 불꽃을 만들어 냈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불을 만들었어?” 내가 허무해하며 묻자 그는 “지붕을 열었어”라며 윙크했다.
뭔데, 섹시하게!
우리도 알지, 불은 산소가 필요하다는 거 우리도 아는데... 참. 이론과 실전이 이렇게 별개라니... 책상머리가 서바이벌에선 별로 쓸모가 없다는 걸 느낄때마다 지난 인생이 허무해진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삼봉을 보러 올라가야 하지만, 나는 가지 않고 산장에 머물렀다. 어제 너무 잠을 설쳐서 정신이 몽롱하고, 손발에 힘이 없는 데다, 이곳저곳 테이블을 기웃거리며 음식을 얻어먹는 재미에 빠졌기 때문이다. 가만히 산장 식탁에 앉아 전망대에 다녀온 사람들의 비디오를 본다. 칠레노들이 어제 찍은 비디오를 보여주었다.
“야, 이거 재생이 안되는데? 온통 하얀 것 밖에 안보이잖아”
“크크킄,친구야, 그게 우리가 보고 온 거야. 하하하하"
그들은 똑같은 화면을 앞다투어 보여주었다. 안개와 눈으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새하얀 장면이었다. 곧이어 양말이 마르자마자 삼봉을 보러 출발했던 어린 한국 남자 둘이 산장에 돌아왔다.
"뭐 좀 봤어?"
"정말 아무것도 안 보여요 1m 앞도 보일까말까에요"
"애들아, 이 날씨면 전망대 하나쯤 스킵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하지만 그들은 언제 또 여기 와보겠냐며 다음 전망대를 향해 바로출발한단다. 그들의 모습이 치열하게 느껴진다. 어쩐지 짠하다.그들의 손에 과자와 초콜릿을 쥐어 주었다. 다른 여행자들에게 받은 간식이었다. 그들은 신나 하며 과자를 들고 안개 낀 산으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전망대 안 가시게요?라는 물음에 나는 "다음에."라고 답했다. 오늘 안 보여주겠다는 파타고니아를 이겨낼 자는 아무도 없다는 걸 아니까. 다음에 또 올 이유를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