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기억에 남는 행복했던 순간

by 고카


‘기억에 남는 행복했던 순간‘

화상영어 선생님이 다음 시간 영어 말하기 숙제 제목으로 내주신 주제이다. 살면서 환희의 순간이 없었겠냐마는 그중에 베스트를 뽑자니 어느 순간이었는지 손꼽기가 어려웠다. 엄마가 암이 아닌 것을 알았을 때? 대학 졸업하고 취업했을 때? 결혼했을 때? 아이가 태어났을 때? 친구들하고 즐거운 여행을 갔을 때? 너무 많고 그 기쁨들 모두가 소중했다. 하지만 그렇게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일들이 기억은 나지만 그때 느꼈던 감정의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큰 이벤트였던 행복에 대한 기억은 잘 나지만 그 당시의 느낌은 ‘이럴 거야~’라는 추측만 하게 된다. 그런데 작고 소소했던 기억인데 그 기쁨과 즐거운 감정이 생동감 있게 느껴지는 추억이 하나가 있다.


어릴 저 내가 살던 집은 한옥을 개량한 집이었다. 아궁이를 메우고 입식 주방을 만들었고 기와집 처마 밑에 쓰레트라는 패널을 덧대어 비와 해를 피하는 공간이 있었다. 대략 내가 4~5학년 즈음이었던 때로 기억이 난다. 무더운 여름 시원한 장대비가 내린 날이었다. 그때는 풍경이나 사물에 감정을 이입할 만큼 섬세하지 않았었는데 그날은 시원하게 내리는 비의 모습이 좋았다. 쓰레트 골 사이로 흘러내린 빗물이 아이 오줌 줄기처럼 마당을 향해 뿌려지고 그 아래 놓인 양동이에 물이 또로로 흘러들어갔었다. 그 와중에도 엄마는 마당 처마 아래에서 일을 하고 계셨었다.


정말 아쉬운 건 옛날 그 시절 살던 집의 모습을 찍어둔 사진이 없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여기저기 찍어뒀을 텐데 그 시절의 모습은 내 머릿속에만 남아 있다. 대신 소소하지만 그 잔잔하고 포근했던 기억은 은은한 향수처럼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어서 참 다행이다.


행복이라는 건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걸 얻는대서 느끼기도 하지만 때론 잔잔하고 평온했던 순간에도 느끼게 된다. 요즘 산책을 하다 달리기를 하다 아니면 길을 가다가 마음에 드는 풍경이 나오면 30초 영상을 찍는다. 1분도 안되는 시간이지만 찍다 보니 은근히 30초가 길었다. 그 짧은 순간이나마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고 온전히 나의 오감을 통해 느낀 기분을 영상으로 남겨 기록도 하고 공유도 하고 싶었다.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우리는 살고 있다고만 생각하지 죽어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모순된 생각과 함께 우리는 지금이 아닌 나를 과거의 아픔이나 기쁨의 기억 속에 가두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는 막연함에 기대어 현재의 가치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오늘 하루 지나면 곧 주말이 올 거야 오늘만 버티면 쉴 수 있어.” 오늘은 버티고 지나쳐 버리고 싶은 하루가 될 수 있겠지만 시간이 흐른 뒤 오늘을 바라보면 아쉬움과 후회가 남기 마련이다. 오늘도 바쁘게 하루를 달려왔다. 하루가 끝나가는 이 시간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있어 너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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