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밭 길 지나서 오솔길.
고갯길 넘어서 갈림길.
막다른 골 되면 돌아선다는데,
미로에 들어 헤맬 때
“내가 길이노라.”
맑고 높은 상아탑 안에서
머리띠 질끈 동이고,
책 속에 구멍을 뚫으며
구하고 있을 때,
“내가 진리노라.”
목구멍 풀칠하느라
몸부림치며,
깊은 흙탕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내가 생명이노라”
먼 눈으로 길을 찾고
굳은 머리로 진리를 구하며,
앙상한 손으로 지푸라기를 잡을 때,
들려오는 말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사람이 차도(車道)로 다닐 수 없다. 들에 나있는 논둑길 밭둑길이건, 산에 나있는 오솔길이건 인도(人道)로 다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한 평생 살다보면 오르막길 비탈길과 내리막길이 있고, 때로는 갈림길에서 당황(唐慌)하거나 미로(迷路)에서 방황(彷徨)하기도 한다.
사람이 한 길을 가는 것이 성공의 길이기도 하지만, 한 길만 가다가 실패할 수도 있다. 나는 인본주의(人本主義)가 곧 인도주의(人道主義)로 믿고, 이 미로(迷路)를 걷다가 벼랑 끝에 섰다. 이 때 길을 찾았다. 예수가 곧 길이었다. 길을 잃은 사람만이 길을 안다.
진리(眞理)란 참된 도리(道理)다. 바꿔 말하면 누구나 인정하여야 할 보편타당(普遍妥當)한 지식(知識)이다. 현자(賢者)는 이 진리를 찾기 위해 평생 수련(修鍊)을 하고, 학생은 이 진리를 탐구(探究)하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 나는 한 때 이 진리가 무엇인지 철학(哲學)의 언저리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법학(法學)을 연구하는 것이 지름길이 아닌가 생각도 했다.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고 했을 때, 상아탑(象牙塔)은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 진리를 알았다. 곧 예수가 진리였다.
나의 의지(意志)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얻은 생명(生命)을 지키기 위해서 별별 일을 다 했다.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지키기 위해, 다른 생명을 경시(輕視)하거나 침해(侵害)까지 한다. 내가 직업(職業)을 가지고 고생(苦生)하는 것도, 성공(成功)을 위해 진력(盡力)한 것도 모두가 생명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리를 깨닫고, 치열(熾熱)한 생존경쟁(生存競爭)에 뛰어든다. 이 싸움에서 패잔병(敗殘兵)이 된 나는 자살(自殺)도 생각해봤다. 그러나 생명은 명령(命令)이다. 내 마음대로 용도(用度) 변경하고 폐기(廢棄) 처분(處分)해도 되는 내 소유물(所有物)이 아니다. 글자의 앞뒤를 바꾸고 생각의 안팎을 뒤집었다. ‘자살⟶살자’로 되었다. 예수가 곧 생명이므로.
’62년 내가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맨 먼저 내 마음을 뒤흔들었던 것은 요한복음 14:6,7이었다.